
중학교 졸업을 하던 그 해 겨울방학이 내게는 참 특별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항상 집에서 사주는 것만을 읽었던 아이에서 내가 읽고싶은 책이 있으면 서점에 가서 죽치고 앉아서라도 읽어야 하는 아이로 바뀌었고 그때문에 집에서 처음으로 등록해준 학원을 한달이나 빠져야 했다. 자연스럽게 아침마다 학원앞을 지나쳐서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시내까지 걸어가 서점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서 책을 읽다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그 서점의 출입구를 딱 막아 버리고 내가 그 안에 있는 책을 모두 다 읽을 때까지 나 혼자만 그 서점을 소유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책을 좋아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책을 좋아했기 때문일까?
학교에서 시켜서가 아닌 혼자 쓰고 싶어서 처음으로 글 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무렵이었다. 수필이나 다른 것도 아닌 ‘시’ 였다. 멋진 시라는 것은 아름다운 어휘만을 골라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하나가득 내 생각에 아름다운 단어들만을 골라서 채워 넣었던...참 유치했던 시였지만 그 시로인해 난 내가 쓴 글을 통해 내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말 절묘하게도 내가 진학했던 고등학교에는 내가 살던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 문학회가 있었다. 그리고부터 만으로 꼭 10년이 흘렀다.
그때 이후 내가 가장 많은 소재로 삼아왔던 사물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난 두말하지 않고 ‘비’ 라는 사물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물론 감정이나 전반적인 풍경이 아닌 단지 어떤 사물 자체를 내 글의 소재로 삼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 글의 가장 큰 소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난, 비가 온다는 것에 대해 유난히도 많은 감흥을 느끼는 것일가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비에대해서 나만큼의 감흥을 느끼는 것일까.
정말로 오랜만에 시원하게 비가 오고 있다. 며칠동안 오후의 햇살은 오히려 따뜻하게 느낄정도로 날이 덥기도 했었고 다시 또 며칠은 머리를 빗기 신경질날 정도로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것의 마무리인 것 처럼 오늘 오후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면 항상 자연대 앞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어야 할 사람들도 모두 건물안으로 쫓겨 들어갔고 창문으로 내다본 곳에선 드문드문 한두개의 우산들만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복도쪽으로 나있는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보면 비에 쫓겨 건물로 들어온 사람들이 내는 소리들로 웅웅 거리는 낮은 메아리가 가득할거란 생각이 든다. 고작 한줄기 비가 한시간째 오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런 기분이 든다는게 우습기는 하지만 지금의 난...지난 수주일을 고민했던 것들, 아파했던 것들, 기뻐했던 것들 이런 모든 감정의 흔적들이 빗줄기에 씻겨 바닥으로 휩쓸려 내려가 버린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극도로 차분한 마음상태.
마음이 차분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유난히 향이 진한 원두를 골라 마시지도 않으면서 계속 향만 우러나고 커피 메이커를 켜놓거나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침대에 앉아 이불을 둘러쓴채 창 밖으로 들려오는 비의 흔적들을 듣는 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그 사람의 체취를 가슴 한가득 들여마시는 일처럼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마음이 가라앉아 생긴 만큼의 여유공간을 행복이 가득차게 해주는...그런 차분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일이다. 이런 차분함은 우울함과는 분명 다르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흥은...우울함이 아닌 차분함이다.
2003년 4월 18일 오후 두시.
이유에 대한 상세한 근거를 들거나 상태를 묘사하기 힘든 마음의 차분함과 행복감에 젖어 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