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이 일상화 되기 전.
그러니까 군대에 가기 전 수년간 나는 연락처 수첩을 무척 꼼꼼하게 적었었다. 삐삐 라고 불리웠던 무선호출기가 보편화 되고 있었던 시기였고 그 때문에 상대방의 호출기 번호를 적어놓은 수첩을 아마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첩을 다 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새로운 수첩을 사서 사람들의 연락처를 옮겨적곤 했다. 그리고 그럴때면 매번 몇명씩은 새로운 수첩으로 옮겨가지를 못했다. 앞으로 연락할 일이 많을 것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의 연락처를 주저없이 지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무살 초반의 나이엔 대부분 그렇듯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고 연락처 교환이 있었기 때문에 몇명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수첩을 새로 정리할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새로이 생겨났다.
내가 수첩을 더이상 정리하지 않게 된 것은 입대후 2년이 되었던 시점이었다. 더이상 정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있었던 관계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수를 보충할만큼 새로운 만남들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그 2년동안 지속적으로 이름들이 사라지기만 했던 내 수첩엔 더이상 지울 사람들이 남아있지를 않았었다. 제대후엔 휴대폰에서 이와같은 일이 반복이 되었었지만.
이 습관은 다른 쪽에도 작용해서 홈페이지를 리빌딩 할때마다, 혹은 주소를 변경할 때마다 나는 내가 썼던 글들을 정리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복구할 수 없이 지워 버렸었다. 물론 불의의 사고로 인해 일정 기간동안 썼던 글을 잃었던 3번의 경우를 제외하면 상당히 착실하게 글들이 모인편이지만 모르긴 해도 내 손으로 지운 글들이 95년에서 99년 사이에 있었던 3번의 사건들로 지워진 글보다 적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2000년 이후엔 큰 사고는 없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글들은 제법 잘 보관되어 있는 편이다.
블로그 템플릿을 변경하면서 예전 글들을 일일이 다시 열어보면서 글의 날짜를 조정했다. 어제 저녁 먹기 전까지 주말을 투자해서 정리하고 나서 블로그 아카이브를 바라보니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빠진 곳 없이 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정리하는 와중에 지우고 싶었던 글이 있었지만 일단은 그냥 둬 봤다. 왜냐하면, 그 글이 2004년의 유일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2월에 썼던 글이고 너무나 따뜻한, 그리고 미소를 머금게 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그 해에 난 나를 무척 아껴 주시던 작은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아버지 또한 암으로 잃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한달전 결혼도 했다. 그 와중에 석사 졸업논문을 써야 했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드리기 위해 내 첫 해외 학술지 투고 논문을 포기했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돌이켜 봐도 남아있는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보냈던 시기였다. 그러니 차분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 가며 글을 쓸 시간이 없었겠지. 그래서, 2004년엔 단 하나의 글이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이 글을 지워버리고 싶었는지. 2004년을 내 기억에서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결혼을 한 기분좋은 해이긴 하지만 돌이켜서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2004년의 모든 사건들을 바로잡고 아내와도 내년이나 후년쯤 결혼하는 것으로 바로잡고 싶다.
나와 내 소중한 이들이 모두 아프고 힘들게 지나갔던 2004년. 그처럼 그 해의 시작에 희망찬 바램을 담아 썼던 그 글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제 난 끝내 그 글을 지우지 않았다. 이유? 모르겠다. 그냥 지우면 안될 것 같았다.
어쩌면 이제 난, 새로운 것의 홍수속에서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점차적으로 새로운 것들보다 지나간 것들을 챙기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나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는 스무살의 나이에 새로운 것들의 홍수를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불혹의 나이를 넘겨서도 여전히 그 홍수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을....글을...기억을.
정리한다는 것은 어쩌면 후회의 또다른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후회하기에 외면하는 것일테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글을 정리하면서 외면하지 않았다는 경험이 날 생각의 홍수속으로 밀어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