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흡, 인내 그리고 최대한 즐겁게.

2009년 3월 31일 화요일

모자이크



어제 밤, 맥에 저장되어 있는 아내 사진들을 보다 만든 모자이크.

그런데..흑백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도 완전한 검은색이나 흰색에 가까운 사진이 이렇게 없을 수 있나....orz



2009년 3월 30일 월요일

대한민국 개신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단히 기분이 상해서 쓴 글이므로 염두에 두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냥 넘어가셔도 좋구요. ^^)

어제 기분나쁜 일이 있어 오늘은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그 이전에 먼저 머릿글을 늘어 놓자면, 나는 3대째 개신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옹알이와 주기도문을 같이 배우며 성장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나는 개신교가 싫어 가톨릭 신도로 살고 있다. ‘개신교도’가 아닌 ‘개신교’가 싫다고 한 것은, 그릇된 단체라도 올바른 개인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신교를 믿는 많은 친구들을 갖고 있으며 가장 절친한 친구도 흠잡을데 없는(개신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개신교 신도이다.

개신교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를 이야기 할 때 ‘기독교’ 라고 하는데 틀린말은 아니지만 좀 구분지어 줬으면 좋겠다. 미국인과 이란인이 모두 ‘지구인’ 이라고 지칭하면 양자간의 차이를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져서 간략하게 요약하면, 기독교는 개신교와 가톨릭(천주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리스 정교회 등 한국에 거의 없는 교파는 빼자) 개신교는 중세 가톨릭의 타락에 반기를 들어 일어난 종교개혁의 결과물이다.(내가 개신교도라면 자랑스럽게 사용할텐데 이상하게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란인은 ‘이란인’ 이고 자신은 ‘지구인’ 이라고 지칭하는 이상한 ‘미국인’들이다) 언론에 자주 노출되서 일반인들도 들으면 알 수 있는 요즘 유명한 성직자로 가톨릭쪽은 고 김수환 추기경을 들 수 있으며 개신교쪽은 추부길, 장세동, 조용기 목사님등을 들 수 있다. 요즘 어이없는(x1000) 말 실수(실수인지 의도인지 모르겠지만)를 자주 해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교황님은 가톨릭 쪽이고 촛불 시민을 사탄이라 지칭하고 인도네시아 지진참사를 이교도들에 대한 하느님의 천벌이라고 하여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분들은 개신교 쪽이다.(다른나라 목사님들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어쨌든 대한민국에선 그렇게 말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새로 입주를 시작한 아파트 단지의 공통된 특징일텐데, 음식점들과 인근 서비스업 관련 상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전단지 폭우를 쏟아낸다. 집 문 앞은 벌써 열쇄 전문점 스티커가 8개인가 9개가 붙었고 그동안 떼어낸 전단지는 셀 수조차 없다. 가장 많은 수의 전단지는 뜻밖에도 교회 홍보 전단지이다. 중국집 전단지보다도 많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집 전단지는 몇몇 곳에서 도배를 하다시피 지속적으로 뿌리는 것임에 반해 교회 전단지는 거의 매번 다르다. 동탄이 세대수가 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 많은 교회들이 도대체 어디에 숨이 있는 것인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어제는 산책을 하는데 여성 두분이 다가와서 선물과 함께 교회 전단지를 주며 예수 믿으라고 인사를 했다. 선물은 사양했고 전단지는 이미 봤을 거라고 웃으며 이야기 했더니 나를 따라 오시면서 자신들의 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인지 내게 설명하려 애를 썼다.(TV에 나온적도 있어요. 음..맛집기행인가? 동탄에서 우리 교회가 가장 커요. 축구장도 홍보하는 건 처음 알았는데? 그러니까...TV에 나온 적 있고 건물의 크기로 교회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나가는 곳이라는 말인가?) 가톨릭 신도라 이미 성당에 나가고 있다고 좋게 거절했더니 굳은 얼굴로 가톨릭은 거짓 종교이기 때문에 믿고 있으면 지옥불로 떨어진다고 했다.(짧게 말했는데...사실 내가 당황해서 멈추고 얼굴을 쳐다보자 글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말들을 하셨다. 천주교 신자에게 돈이라도 뺏겼나?) 다른 한분이 그 말을 한 여자분을 뒤로 잡아 끌며 전도할 때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말라니까 자꾸 그런다며 질책하는 모습을 보곤 별 말 없이 목례만 하고는 뒤돌아 섰다.

휴...그분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저들을 그릇되게 인도한 목자들의 잘못이지. 하지만 솔직히 기분은 나쁘다. 그래서 글로 화풀이를 좀 하고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 목사님 수가 16만명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교회연합신문이 이달 초에 주장한 바에 의하면 돈 받고 그냥 목사 자격을 부여하는 수백개의 개신교 소속 신학교들 때문에 목사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08년에 문광부에서 조사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개신교 신도 수는 860만명 정도라고 한다. 그것도 감소 추세. 목사 1인당 56명 정도의 신도수인데 대형 교회들을 빼면 나머지 교회들의 신도수는 암담한 지경이다. 2004년도에 전화번호부에 등재된 교회만 6만여개라는데 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이미 이 당시 숫자로도 전국 슈퍼마켓의 9배, 중국집의 2.5배(정말 더 많았네?), 약국의 2.4배가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로 수준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목사들의 생존경쟁이다. 으리으리한 교회를 짓는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신도 살아남고, 처자식도 먹여 살리려면 교회에 헌금을 바치는 신도의 수를 늘려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치장하고, 남은 비방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못하면 조만간 교회 문을 닫아야 하며 목사 숫자로 봤을 때 다른 교회에 빌붙어 살기도 쉽지 않다. 대형 교회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한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하면 다들 그런다. ‘우리 교회는 안그래요’라고. 웃기는 소리. 안그런 교회들은 대부분 대형 교회들인데 조금 거칠게 대충 구분지어서 목회자 1인당 평균 개신교도 숫자인 56명의 열배를 넘는 교회들은 큰 교회라고 해보자. 대한민국 개신교가 부흥을 한 근본 원인은 대한민국 초기 개신교단이라 불러도 좋은 100년전 평양 장대현 교회로부터 기인한다. 장대현 교회의 원칙은, 신도수가 일정 수 이상 늘어나면 신도수가 적은 교회로 안내하던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의 신도수는 늘지 않더라도 교단의 전체 신도수는 늘어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교회에 일정수준 이상의 교인과 헌금이 몰리지 않도록 경계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개신교가 빠르게 성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은 어떤가. 대형교회들이 몰려드는 신도들을 인근 교회로 안내하던가? 천만에! 대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보더라도, 인터넷으로 예배를 생중계 해서라도 절대로 신도를 뺏기지 않는다. 욕심이 나는 것이다. 내가 고생해서 세운 교회고 이렇게 크게 키웠는데 이걸 남에게 넘길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교회를 다닌다면 한번 담임목사를 찾아가 물어보라. 이미 이룬 교회를 아무 조건 없이 다른 목사님께 넘기고 새로운 개척교회를 만들어 손길이 닿지 않은 이들을 위해 새로이 시작하시라...고. 평생 예수님의 고행을 본받아 편안한 이불과 고급 승용차, 으리으리한 교회를 떠나 낮은 곳으로 임하시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사시는 목사님들도 있다.(우리 집안에도 있었으니까) 내가 말하는 건 대형교회 목사들이다.

뭐...입아프지만 그래도 열심히 개신교회가 고쳐야 할 것들을 지적하면 다들 그런다. ‘우리 교회는 안그래요.’

물론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잘못을 인정하는 건 쉬운일이 아니다. 하지만....이제는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스님도 천국 갈 수 있다고한 미국 개신교를 장경동 목사가 비난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더부살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방식을 잊은 대한민국 개신교는 십자군 전쟁 당시 가톨릭의 잘못을 그대로 밟아 나가고 있다. 십자군 전쟁 이면에는 정치적, 경제적 야심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 개신교 목회자들 역시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신도들을 몰아붙인다. 그리고 그들에게 배운 신도들은 그저 그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에 실망한 탓에 지속적인 개신교도의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 그만큼 목사들의 생존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대한민국 개신교는 자멸의 길을 향해 갈 것이다.

불가능 하리라 생각하지만, 대한민국 개신교가 살아 남으려면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고(나는 굶어도 내 새끼는 잘먹이고 잘입히고 싶은게 인간의 본능이며 이것은 금전에 대한 욕심을 불러온다), 성직자의 수를 통제해서 개나 소나 목회자가 되는 걸 막고(개신교에서도 인정했듯 질낮은 목사의 대량 양성을 막아야 한다), 중앙 교단에서 월급을 지급하고, 일정 기간마다 성직자의 소속 교회를 강제순환 시켜서 특정인의 교회가 없게 하며 교구제도를 실시해서 교회당 신도수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 만이 점차 사유화 되면서 부패해가는 개신교회를 살리는 방법이다.

가톨릭(천주교)를 비판하는 개신교 신도들은 교리를 들고 싸우자고 든다.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 성경상의 교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동안 자신이 속한 개신교 자체는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개신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는 건 개신교회의 목회자들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인지할 필요는 있다. 현재 대한민국 개신교가 처한 상황을...쇠락의 길을 말이다.

왜, “우리 교회는 안그런” 것 같은가?



2009년 3월 29일 일요일

신조협려(神雕俠侶)



내가 김용의 무협소설인 영웅문 시리즈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1984년인가 그럼...) 1부 6권을 하루 반나절만에 모두 읽어 버릴만큼 흠뻑 빠져버렸다. 그 이전까지 무협지라는 걸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사촌형에게 빌린 여섯권의 책이 이후 한동안 무협지에 빠져 지내게 만들었다. 결국 3부까지 총 18권을 책을 2주만에 전부 읽어버렸다. 그때까지 많은 책을 읽었었지만 위인전과 고전소설 등이 전부였기 때문에 김용 스타일의 무협지는 내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김용의 무협소설을 섭렵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두번째로 읽었던 영웅문 2부 였다. 원제목이 신조협려(神雕俠侶)라는 건 대학에 오고 나서야 알았다. 김용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남자는 양과를, 여자는 소용녀(신조협려의 남녀 주인공들)를 특히 좋아했었는데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친구들이 이상형을 이야기 해보라면 ‘소용녀’라고 대답해서 친구들을 갸우뚱 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땐 주위에 무협지를 읽은 친구들도 없었고, 요즘처럼 영상물로 접할 수도 없었다. 그냥 책으로 읽고 책에 묘사된 것을 내가 상상으로 그렸던 인물인 탓에 누구에게 설명을 해 줄 수도 없었다.

얼마전 후배들과 무협지 이야기를 하다 김용의 소설들은 드라마로 수없이 제작이 되었지만 난 내가 상상했던 풍경과 인물들의 모습을 다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안본다고 했더니 후배 하나가 “형, 신조협려 2006은 꼭 보셔야 해요.” 라고 추천을 했다. 도대체 왜 그러나...하고 인터넷으로 신조협려 2006을 검색해 봤는데 눈길을 끄는 내용들이 있었다. 바로 유역비라는 여배우가 연기한 소용녀가 자신이 바로 상상했던 소용녀의 모습 그대로다..라는 감탄사들.

마침 집에서 보고 있는 IPTV에 신조협려 2006이 무료로 서비스 되고 있어서 주말에 한번 틀어봤다. 그리고는 헉....하고 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어린시절 내가 상상했던 소용녀가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호들갑을 떨었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굉장히 여러번 드라마로 제작되었던 신조협려지만 유독 2006년도 버전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생각됐다. 원작 소설의 팬들이 공통적으로 상상했던 소용녀의 모습을 이처럼 충실하게 재현했으니.

다만 좀 아쉬운 점 두가지는, 첫째로 유역비가 연기하는 소용녀는 고묘를 탈출하기 전과 후로 나뉘는...다시말해 감정에 눈을 뜨기 전과 후의 소용녀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냥 한결같이 넘칠만큼 사랑스럽다. -_- 뭐...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소용녀의 모습은 감정에 눈을 뜬 후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소용녀의 모습이니 다들 불만은 없어 보이지만 난 조금 아쉽다. 둘째로 너무 어려보이는 소용녀의 모습이다. 원작에서 그려지는 소용녀의 모습은 양과를 제자로 받을 당시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아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이고, 나이가 들어서는 단장애 계곡 아래에서 감정을 끊고 16년간 산 탓에 나이에 비해 동안으로 보이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써놓고 보니...모든 여성들이-남자들 뿐만 아니라- 원하는 인물이기도 한듯?) 유역비가 연기한 소용녀는 그냥 한결같이 어려보인다. 심지어 고묘 탈출 전에도 양과보다 어려 보인다. ㅡㅜ 배우 자신이 1987년생이니 어쩔 수 없었던 건지...중국의 분장술이 부족한건지...연출자가 의도적으로 어리고 예쁘게만 표현한건지...여하튼 그 부분은 많이 아쉽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부분을 빼면, 원작 소설에서 표현했던 소용녀라는 인물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거의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덕분에 이후 신조협려를 또다시 제작하려면 여배우 선택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을 듯 하다. 사실 유역비라는 여배우가 비교할 사람이 없을 만큼 예쁜건 아니다. 한국엔 더 예쁜 배우들도 많고 아시아 권에서 찾아봐도 수두룩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소용녀 역을 고르기 어려워 질거라 생각하는 건, 원작에서 묘사된 소용녀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이미지 때문이다.

저녁 먹기 전까지 신조협려 2006이나 좀 더 봐야겠다. 할 일이 많아 풀로 달리지는 못할테고..;;



2009년 3월 27일 금요일

심심...

아내가 입덧 때문에 처가가 있는 강릉에 내려가 있다. 덕분에 이번주 내내, 그리고 다음주까지 혼자 지내야 한다. 해외 출장을 가도 일주일이었는데...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어 보기는 처음. 사실 아침 일찍 나와서 밤 늦게 들어가기 때문에 낮시간 동안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는데 집에 들어갈 때 그리고 잠들기 직전이 영 심심하다.

결혼 후부터 잠들기 전에 둘이 침대에 엎드려서 NDSL로 게임을 하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잠드는 버릇이 들었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으니 영 허전하다. 어제는 하도 잠이 안와서 안방 창문을 열고(안방 창문은 베란다로 연결되어 있고 베란다에는 초롱이 집이 있다) 초롱이를 인형으로 약올리며 놀다가 1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이번 주말에는 일이 많아서 강릉에 못가고...천상 꼼짝없이 다음주말까지는 계속 심심한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할 듯 하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는 것도 이런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서 그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 내셨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



2009년 3월 24일 화요일

남과 다르지 않다

'남과 다른 아이로 자라거라'

어린시절 내 뒤를 따라 다녔던 어머니의 주문과 같은 요구였다. 정확히 초등학교 2학년때로 기억하는데(음...아닌가? 3학년때였나?) 그 때 학교에서 부모님에 대한 글짓기를 해오라는 숙제를 받아와서 집에서 숙제를 하기 위한 대화를 할 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그대로 글짓기에 포함되었고 선생님께서 인상깊은 문장으로 꼽으셨었다. 어쨌든 그 때 이후 남과 다른 아이가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그대로 주문이 되어 날 따라 다녔다.

공부를 잘해라, 의사가 되야 한다 등의 요구가 아닌 남과 다른 아이로 자라라는 그 말을 따르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늘 남과 다르기를 바랬다. 평범한 건 싫었다. 남과 다르다는 건 대다수와 달라서 눈에 띄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장을 해야 했고 선생님이 잘못 행동한다고 판단되면 그자리에서 바로 왜 그렇게 행동하시는지를 질문해서 선생님들을 난처하게 했던 되바라진 아이이기도 했다. 특히 선생님들이 알면서도 저지르는 일상적인 잘못을 보아 넘기질 않았다. 초등학교 몇학년이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데 담임 선생님이 어머니께 교사생활 수십년에 나같은 학생은 처음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정도니 오죽했을까 싶다. 유행을 무시했고, 남들 다 보는 TV는 중학교 이후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학 입학 신입생 OT 에서 '모래시계' 라는 드라마를 안본 사람이 전체 참여자중 나 하나라는 걸 알았을 때 놀라워 하는 선배와 동기들 사이에서 난 근거없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대학에 와서 컴퓨터라는 것을 접했을 때 모두가 MS윈도우를 쓰는 걸 보고 같은걸 쓰기 싫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다른 운영체제라는 이유만으로 OS/2 를 구입해서 사용했고 이후에는 남들이 OS/2 보다 더 안쓴다는 이유로 리눅스를 선택하기도 했다.(물론 이후에는 철학적인 이유로 리눅스와 자유소프트웨어에 빠지긴 했지만.)

지금서 돌이켜 보면 남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쉬운 길은 하나도 없고 늘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좋은 의미의 주목 보다는 나쁜 의미의 주목이 더 많다. 그래도 난 내가 남과 다른게 좋았다. 내가 남과 다르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면 우울해질 정도로.

...

그런데 최근 몇년동안 내가 남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아무리 독특하게 생각을 한다고 해도 내 생각과 행동은 대중의 생각과 행동에 일치했고 큰 흐름에서 도드라지지 않았다. 한동안은 나도 별 수 없구나 싶어 의기소침 해지기도 했는데 최근들어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남과 다르지 않다' 는 것은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쪽으로.

간단히 말해, 내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더라도 그것이 대중이 원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대다수도 잘했다고 평을 했으며 내가 비난하는 일에는 많은 이들이 역시 잘못했다며 비난을 한다. 주식시장 전망부터 심지어 명절 러시아워를 피하기 위해 선택하는 시간대까지 대중과 나는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같이 손해보고, 같이 이득보며, 같은 시간에 고속도로에서 답답한 한숨을 내쉰다.

대중은 우매하다. 하지만 판단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결국엔 가장 적당한 길을 찾아낸다.



2009년 3월 23일 월요일

서점 나들이

이곳으로 이사온 지 한달이 되었다. 조용한 동네. 완전한 주택가로 지어져서 그런지 단지 근처에 유흥가가 없다. 상점과 식당들만 늘어서 있는 상가단지는 있지만 주점이나 기타 유흥 일부러 찾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아내와 저녁을 사먹으러 외출을 했다. 입덧도 이제 막 시작한 주제에 먹고 싶은 음식은 하루에도 열두개씩 쏟아져 들어온다. 어떤 음식이 생각난다기 보다는 TV를 보다 음식이 나오면 ‘저거’하고 지목하는 수준이라 정말 예상 밖의 음식들이 툭툭 튀어 나온다. 어제는 ‘패밀리가 떴다’ 재방송을 보던 중 추어탕을 먹고 싶다는 바람에 가볍게 옷을 주워입고 둘이 동네 상가로 추어탕 가게를 찾아 나갔다. 그러나 추어탕 가게는 찾지 못했고 돌아다니던 중 묵은지 찌개를 먹자고 방향을 선회해서 그걸 먹었다. 나는 별 느낌 없었는데 너무 맛있게 먹길래 포장까지 해서 집에 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청과상에 들려서 과일을 사고 서점에 들려서 책 구경을 좀 했다. 서점을 구경하는 건 언제나 기분좋은 일이다. 동네가 아파트 단지고, 인근에 중고등 학교가 많아서겠지만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큰 서점이 두개나 있다.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입구부터 빼곡히 쌓여있고 진열되어 있는 것은 아이들 참고서적.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그 다음 많은 것은 유아용 서적. 베스트셀러 전시대는 서점 깊숙한 곳, 제일 모퉁이에 자그마하게 놓여 있었다. 컴퓨터와 자격증 서적에도 밀린 소설과 수필류등은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가져다 놓았다는 느낌이었다. 서점을 찾는 고객들의 성향을 분석해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겠지.

보기에 좋았던 것 하나는, 마주하고 있는 다른 서점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가 들어갔던 서점은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넓은 테이블이 하나 있고, 편한 의자를 그 주위에 나둬서 사람들이 책을 꺼내들고 읽을 수 있게 해 두고 있었다. 아이를 한명 데려와서 거기 앉아 같이 책을 읽는 젊은 엄마도 한명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서점이 고향에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중학생 때 고향에서 가장 큰 서점에 방학때 매일 찾아가면서 원했던 소원은 그 서점 문을 닫아놓고 거기있는 모든 책을 내 마음대로 꺼내 읽는 거였다. 그 서점은 시내에 있어서 가려면 버스를 타고도 한참 가야 했지만 일부러 거기까지 매일 찾아갔던 이유는 동네 서점들은 책을 읽지 못하게 했지만 큰 서점은 그렇게 몇시간 서서 읽다보면 서점 아르바이트 하던 형,누나들이 의자를 가져다 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아이와 함께 서점에 와서 책을 읽는 젊은 엄마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내가 읽을 책을 사주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셨던 어머니가 계셨기에 지금처럼 책을 좋아하는 내가 있었다. 저 아이도 크면서 책의 소중함과 가치를 찾는 일에 열심이겠지.

서점, 음식점, 상점.

우리 동네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들이다. 이사온 지 한달...동네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서점의 모습이 너무나 흡족하게 다가왔다. :-)



2009년 3월 22일 일요일

어제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이른 아침부터 안개를 불러온 것일까.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니 얕게 깔린 안개와 밤새 내린 비로 젖은 땅이 싱그러운 흙냄새를 11층까지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래, 확실히 비가 온 직후의 흙냄새가 피어 오르는 시기가 되어 가고 있지. 며칠만 지나면 4월이니까.

베란다의 창문을 활짝 열고 온 몸으로 호흡하듯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코끝부터 시작된 싱그러운 흙냄새가 온 몸을 짜릿하게 타고 흐르기까지는 불과 수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단지 주변 개발이 모두 끝나고 나면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인위적인 것이 전혀 없는 들판과 야트막한 야산들이 모두 사라지겠지..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아쉽다. 하긴, 어차피 그때까지 여기 계속 산다는 보장도 없으니 지금은 그런 것들을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겠지.

아내와 짧은 외출을 하고 돌아온 어제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벚꽃 몇송이가 피어 있는 벚나무를 봤다. 가벼운 웃음, 정신 차리라는 면박을 나무에게 주며 이제 정말로 겨울이 끝나간다는 느낌에 살짝 기분이 좋았다. 꽃샘추위 때문에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시기인 3월. 그 3월은 아직 일주일 이상 남았지만 벚꽃이 피는 지금, 계절은 분명 완연한 봄이다.


2009년 3월 18일 수요일

심장 소리



많은 이들에겐 지나간 경험.

그러나 처음 겪는 사람에겐 비교할 대상조차 없는 경이로움.

바로,

내 아이의 첫 심장 소리.

ps.
그동안 마음 고생을 좀 하느라 블로그 포스팅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잘 넘겼으니 이제 이야기 해도 좋겠다 싶어 포스팅 합니다.



2009년 3월 9일 월요일

멀티태스킹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한번에 하나씩만 처리하도록 일이 생긴다면 참 행복할 것 같다.

지금 내가 동시에 신경써야 할 일은 모두 다섯개. 원래 한두개 더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래서 남은 다섯개 중 내가 어쩔 수 있는게 세개, 없는개 두개. 어쩔 수 없는 건 보통 신경 꺼버리는 편인데 이번엔 신경을 끌 수 없는 일들이라 계속 생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날 건드리고 있다.

또한 난처하게도 어쩔 수 있는 세가지는 모두 굉장히 급한 일이다. 뭐...사람인 이상 동시에 두개를 진행할 순 없으니 하나씩, 하지만 서둘러서 처리하는 수 밖에.

...그만큼의 속도를 내가 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



2009년 3월 5일 목요일

기도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관장하시는 주님.

거...너무 째째하게 굴지 맙시다. ㅡ_____________________ㅡ



2009년 3월 3일 화요일

개...꿈

초롱이도 잠잘 때 꿈꾸면서 달리기는 하지만....이건 비교 불가능의 경지 ㅡ_ㅡb



어제 처음 봤는데 입에 머금었던 커피 거의 뿜을 뻔 했다.



2009년 3월 1일 일요일

마지막 강의

한동안 전세계적으로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랜디 포시 교수님의 마지막 강의를 이제야 접했다. 동영상을 본 것은 아니고 아내가 구입한 책을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서 읽은 것이었는데 어제서야 전부 읽었다. 그리고는 혼자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끙끙대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이 아닌 그 삶을 마감하는 태도에서 느낀 감동과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께 나는 그와 같이 당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삶을 마감할 기회를 만들어 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까지.

죽음 앞에 어찌 변했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아버지는 여린 분이었고 그분께는 당신의 예고된 죽음에 대한 직접 대면 보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더 필요했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하지만, 미리 이야기 했듯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람이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후회는 남는다. 갈래길을 지나고 나서 늘 되돌아 보게 되는 것처럼.

내가 나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나도 랜디 교수님처럼 스스럼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단 한권의, 그것도 길지 않은 책을 통해 인생의 스승을 접한듯한 감동에 푹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