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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트리스

어렸을 때 오락실에 테트리스라는 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잘 하지 못하는 그 게임을 유독 굉장히 잘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 손이 빠르고 느리고의 문제가 아닌...유독 테트리스를 잘 하는 친구들. 나중에 온라인으로 대전할 수 있는 형태로 게임이 발전하고 난 이후 사람들과 게임을 같이 해보면서 내가 얼마나 못하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나, 정말 테트리스를 못했다. 게임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유독 테트리스는 못했다. 결혼 후 아내가 테트리스를 잘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두대의 닌텐도DS를 샀으니까...) 아내와 수없이 대전을 했지만 정말 한번의 예외 없이 백전 백패. 그 비법이 신기해서 아내가 게임을 할 때 옆에 붙어서 어떻게 하는지 관찰을 해봤다. 정답은 뜻밖의 곳에 있었다. 나는 빈칸이 생기면 어떻게든 거기를 블럭으로 메워야 된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하다 흐름이 끊겨서 게임을 망치곤 했는데 아내는 빈 곳에 개의치 않고 그 윗줄부터 다시 쌓아 나가는 것이었다. 빈 곳을 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게임을 하니 실수를 하더라도 영향을 덜 받았고 당황하지 않으니 침참하게 블럭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 지점에서 포기. 깨달았다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초반에 한두번은 나도 빈 칸에 신경쓰지 않고 게임을 잘 진행했지만 속도가 빨라지고 옆사람에게 블럭을 지워서 보내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 되면 나도 모르게 빈칸을 계속 신경쓰고 있었다. 아내에게 게임을 지는 시간이 조금 연장됐을 뿐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살면서 가끔은 그런, 테트리스를 놓을 때 처럼 내가 한 실수를 개의치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필요햘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많은 승부가 나는 것도 게임과 비슷하다. 꼼꼼함은 대범함과 함께 어울어 질 때 강점으로 살아나는 듯 하다. 대범하지 못한 꼼꼼함은 조바심일 뿐이다. 이...

딴 짓

이런 저런 이유로 글을 쓰지 않은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페이스북에 가끔씩 짧게 흔적을 남기고는 있지만 '글' 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의 것들은 아니다. 글의 길이에 의미를 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적어도 생각을 정리/표현 한다는 측면에서 사색의 과정 없이, 또는 시간의 세례 없이 남기는 문...

무제

삶이 힘든 이유는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다.   애초에 내 삶이 힘든 이유를 남이 이해하기도 어렵고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것은 더우기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들불처럼 번졌던 멘토링이 순식간에 사그러 지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이면에 깊게 자리잡은 선의와는 별개로 누군가의 어려운 상황을 분석하고 조언한다는 건 서로에게 쉽지 않다. 45일간의 출장을 마치고 어제 집에 돌아왔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길게 나가 있었던 출장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출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업무적으로도 그렇지만 혼자서 견뎌내는 시간들이 전보다 더 힘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지냈다. 주말이면 근처 산을 찾아가 등산도 하고, 뮤지엄도 찾아가고, 쇼핑도 다니고, 영화를 보러 다니는 등, 휴일이 되면 마트에서 맥주를 한박스 사다가 싼값에 마음껏 취하곤 했던 지난 출장과 비교하면 훨씬 건강하게 그리고 긍정적인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인가, 애틀란타 수족관 인파들 사이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상어를 4시간 가까이 멍하니 보고 있는 스스로를 인지하고나서 알게 됐다. 지금의 난, 삶이 참 힘들구나...하고. 출장이 힘든게 아니었다. 스스로의 삶을 힘들어 하는데 그 시기에 출장을 나온 것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나 자신이 싼 값에 위로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싼 값에 구한 위로는, 내 고민과 어려움을 저렴하게 만들 뿐이다. 어쨌든 혼자 나와 있는 그 시기를 힘들어 하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는 시간으로 쓸 수는 있었다.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최소한 시선을 밖이 아닌 내면으로 향하는 계기는 되었다.  고민되고, 힘들다. 인정하자. 인정한다고 바뀔 건 없지만 최소한 아니라고 스스로를 기만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아낄 수 있지 않을까?

해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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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나라에 오자.

Beethoven: Symphony No. 9 "Choral" - Allegro Assai Movement 4

일에 관련된 내용이라 구체적으로 블로그에 적을 수는 없지만 어제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뭔가 기분을 좀 더 즐겁게 하고 싶어 음악을 이리저리 찾다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이 걸렸다. 정확하게는 Symphony No. 9 "Choral" - Allegro Assai Movement 4. 듣고 있는데 흥이나서 지휘하는 손짓을 혼자 호텔방에서 할 만큼 정말 좋았다.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음악. 그 순간의 내 기분에 너무나 적절한 곡이었다. 음악을 링크를 걸고 싶어서 유튜브를 찾다가 단지 음악이 나오는 것 보다 더 적당한 동영상을 찾았다. 보면서 '그래, 음악을 하는데 폼잡는 것 필요 없이. 이런게 음악 아니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 케이크

첫째와 둘째가 내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서 '깜짝 파티' 를 해야 하니 나보고 케이크 만드는 걸 보지 말고 방에 들어가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느 선까지 모르는 척 해줘야 하는지 몰라 막내를 재울겸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30분쯤 지나서 얼추 됐다는 아내 말에 방에서 나왔는데 그럭저럭 모양을 갖춘 케이크와 두 아이들의 생일축하 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happy birthday to you~' 로 시작해서 '생일축하 합니다~' 로 끝나는 어딘가 꼬인 노래이긴 했지만. :-) 내 생일 자체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지 제법 됐지만 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가족들이 즐거워 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여러가지 일로 머리가 복잡한 시기인데 덕분에 아무 생각 없이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저녁이었다. 땡큐 모두들. :-) 

Haruki Murakami, Piet Mondrian and William Ackerman

1. 나는 메세지를 인위적으로 전달하려 애쓰는 글이 싫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효과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글에서 취하는 과한 상황 연출이나 강조 등이 불편한 것이 주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마치 긴장감을 견디기 싫어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이랄까. 물론 메세지성이 강한 글이나 소설을 아주 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빠져들기도 한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이나 양귀자의 희망 같은...- 그래도 '선호하다' 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해석하자면 나는 메세지성이 아주 강한 글은 선호하지 않는다. 내가 선호하는 글은 건조하게 '이건 무엇이다' 라는 식으로 내뱉는, 마치 무언가에 대한 설명문 같은 글이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만 들자면 바로 그 이유, 메세지성이 강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물론 역설적이지만 하루키의 소설은 상징성이 강하고 메세지 역시 강렬하다. 다만 작가가 그것을 굳이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상황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덤덤히 책 속의 상황을 '그려내듯 보여' 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감정적인 부담을 느끼는 경우는 전혀 없다. 독자에게는 아주 간단한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소설속 상황을 무덤덤하게 '느끼'거나 책을 덮어버리거나.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래서 그토록 하루키의 작품들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누군가에게 그 작품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대단히 곤란해 한다. 무언가 메세지로 구체화된 것을 '찾아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보고 '소설이 그리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언어'로 번역하여 전달하는게 어렵다. 하고 싶지도 않다. 내 '느낌'을 '언어'로 번역하는 순간 왜곡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굳이 표현하자면,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드는지 설명은 못하는데 그냥 그의 글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