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Showing posts from April, 2002

비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

내가 사용하는 만년필은 카트리지 형식의 제품이다.즉, 미리 잉크가 채워져 있는 잉크 카트리지를 마치 캡슐 삽입하듯이 만년필에 삽입해서 사용한다. 잉크병에 만년필 끝을 넣어서 잉크를 빨아들여 사용하는 약간은 고전적인 만년필과는 다르다면 다른 그런 제품이다. 어제 한참 사용을 하다 잉크가 떨어졌다. 원래 들어있던 카트리지가 작긴 했지만 이처럼 빨리 잉크를 다 사용할줄은 몰랐기 때문에 별것 아닌 일이지만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만년필의 중심부를 양쪽으로 돌려서 분리해 냈다. 바로 눈에 들어오는 텅 비어있는 카트리지. 분명 그동안 조금씩 내부의 잉크가 줄어들어 갔겠지만 처음 넣을때 이후에는 한번도 열어본적 없기 때문에 내게는 꽉차있던 잉크가 어느순간 모두 사라져 버리고 투명한 재질의 카트리지만 남아있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손으로 잡아 뽑자 마치 곤충이 벗어놓은 허물이 떨어져 나오듯 빈 카트리지가 떨어져 나왔다. 길이 3센티미터, 두께 5~7밀리미터. 사실 이렇게 비어버린 필기구의 소스를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얼마전까지도 많이 사용하던 볼펜들 중 볼펜의 잉크를 이처럼 투명한 재질에 담아서 내놓는 것들이 많았으며 이중에서도 볼펜의 겉 케이스는 불투명 하고 잉크를 담는 심은 투명한 재질로 되어 있어서 어느순간 다 쓴 볼펜을 열어보면 가늘고 긴, 투명한 심을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내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을때의 상실감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야말로, [비어있다] 라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그와 동시에 지독한 상실감까지.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와같은 상실감을 느끼게 했을까? 늘상 볼 수 있는 작은 사건, 필기구의 잉크가 다 떨어져 버렸다는 작은 사건일 뿐일텐데. 아마 난 그 잉크 카트리지의 두께로 인해 내부에 있던 무엇인가가 비어버렸다는 느낌을 극도로 많이 받은것 아닌가 싶다. 가는 볼펜심이 아닌, 무언가를 담아 놓았던 것이 분명하게 생긴 비어버린 잉크 카트리지의 형태로 인해. 그때문에 비어있다는 사실...

4월 이야기

지독히도 몰아치던 황사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었던 4월이 어느새 끝나간다. 오늘은 4월 27일이고 4월의 마지막 주일이다. 몇년만에 걸려보는 지독한 목감기로 이틀정도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가 어제 밤부터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해서 오늘 점심때까지 이불을 뒤집에 쓰고 있어서인지 지금은 어느정도 나아졌다. 아직도 목이 따끔거리긴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 않고. 지금은 학교에서 꿀차를 마시고 있다. 시험기간에 체력 보강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마시기 시작했지만 정작 시험기간에는 그다지 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냥 맛있어서 계속 마시고 있다. 시험이라고 해도 평소와 똑같은 생활패턴으로 일관했던 만큼 특별히 체력을 더 소모하고 말고의 건덕지도 없었으니까. 누군가를 인정 한다는 것은 언뜻 좋은 해석을 가져오기 쉽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 보면 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누군가가 어떻다 라고 ‘인정’ 한다는 것은 바로 그사람은 그렇다 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격이나 행동, 특성에 대해 단정지어 버리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변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는 사람..그것도 젊은 사람에 대한 단정이야 말로 그사람에 대한 가혹하리만치 잔인한 대처일 것이다. 그러한 단정을 받아버리는 것으로 인해 내 행동이 제약을 받는 것은 불을보듯 명확한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늘 단정을 내려 버린다. ‘저사람은 참 착해.’ 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사람이 스스로를 착하다고 인정한 적이 없는데도 그가 착하지 못하게 행동하면 배신감을 느끼고 화를 낸다. 순전히 자기 자신만의 기대요 단정이었던 것을 까맣게 잊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에대해 단정을 내리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의 기대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준다. 그 사람이 나에대해 실망하든 화를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모를 말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행동에 있어서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속박이 된다. 어린 아이를 앞에 두고 어른들이 들으라는 ...

두 미란 오스발 에레로아

폴라리스 랩소디를 두번째 읽을때까지는 항상 율리아나 공주의 입장을 바라보면서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 오스발의 입장에서 바라보고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율리아나 공주의 ‘다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파킨스 신부가 한 ‘다만 살아가기는 하지 않습니까?’ 라는 말이 주는 감동에서 벗어나고도 한참 남을만한 충격이었다. 오스발은 율리아나 공주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는 건 내가-혹은 읽는이가- 율리아나 공주의 입장에서 읽기 때문이다. [두 미란 오스발 에레로아] 결국 다섯번째 검이 부러질때까지 이어진 율리아나 공주의 ‘독백’일 뿐이었다.

2시간 반 혹은 버튼 한 개

혼자하는 여행의 즐거움은 아무래도 낯선 곳으로 간다는데 있지 않나 싶다.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래서 내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에 매력이 있지 않다면 무엇에 매력이 있을까.  3년만에 정동진에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의 일반화된 생각으로는 정동진이라면 기차를 타고 가야겠지만 당일치기로 다녀올 생각을 하고있는 차에 6~7시간이나 걸리는, 그것도 밤기차를 타고 갈만큼의 여유가 허락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버스를 타고 강릉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정동진에 도착했다. 예전의 그 꼬불꼬불한 대관령을 수년간의 공사를 거쳐 7개의 새로운 터널과 수많은 다리를 이용해 거의 직선으로 만들어 두었기에 서울에서 4시간은 족히 걸리던 강릉까지 직통은 2시간 반 그렇지 않고 중간중간에 서는 시외버스를 타면 3시간여가 걸릴 만큼 단축이 되어 있었다.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단 한차례의 급커브도 없는 도로를 보면서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가끔 높은 고가다리를 지날때 아래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옛길에서 그 흔적을 찾을 뿐이다.  원래가 탄광촌이었던 곳, 정동진. 원래가 매마르고 척박한 곳이었던 이곳에 매마르고 척박한 마음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찾는 사람이 나 뿐일까. 하지만 굳이 매스미디어의 힘에 대한 언급이 없더라도 이제 그곳에서 석탄가루를 발견하기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정동진역이 목적이 아니었던 까닭에 입장료를 내고 해변으로 내려섰다. 여름바다나 겨울바다와 달리 봄의 바다는 따뜻함에 그 존재를 드러낸다. 겨울바다처럼 차갑지도, 여름바다처럼 뜨겁지도 않은 백사장에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거니는 많은 연인들의 모습에서 푸근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이 아닐거라 생각이 들었다. 북적거림과 썰렁하다는 단어 사이의 `한적한’이라는 느낌에 취해 나역시 신발을 벗어들고 발목을 간지럽히는 파도와 백사장 사이의 경계를 걷고 싶었지만 목적지가 그곳이 아님을 상기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