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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2003

Calling you

I’m calling you. Can’t you hear me? I’m calling you. I know you hear me. -------------------------------------------------------------------------------- 가사가 너무나 슬픈 바그다드 카페의 OST 중 하나인 calling you. 오늘 아침에 눈을 뜨면서 머리속을 지배해 버린 멜로디지. 나만 그런것은 아니겠지? 아침에 눈을 떴을때 흥얼거리게 되는 음악이 하루종일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말이야. 지금은 저녁 7시이고 연구실이야. 연구실에 나와있던 선배와 둘이서 저녁을 시켜먹고나서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어. 일요일의 일상은 참으로 단조롭지. 아침에 일어나서 주중에 거의 하지 않는 세탁물 정리를 하고 방안에다 널지. 어딘가 볕이 잘 드는 곳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 방이 그런 공간을 갖고 있지 않고 더욱이 방이 북향이라 바짝 마른 옷을 기대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어. 마르지 않는건 아니지만 햇볕에 잘 마른 옷과 그냥 마른 옷은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거든.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컴퓨터로 영화를 한두편 보다가 점심을 먹고나서 학교에 올라왔어. 특별한 약속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날은 이렇게 별 일 없이 학교에 올라와서 시간을 보내곤 해. 그리고 그렇게 학교에 와서, 다시말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 오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이 Calling you 의 mp3를 찾아다닌 것이지. 워낙 유명한 곡이라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랄까. 간혹 음악에 취해있을때가 있어. 이것저것 한다기 보다는 하나에 몰두하는 성격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드는 음악이 있으면 다른 곡을 듣지도 않고 그 곡만 계속 반복해서 듣지. 가장 처음은 조지윈스턴의 December 앨범이었어. LP 였는데 판에 기스가 날때까지 반복해서 들었지. 이후에 CD로 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아직까지 사지도 못하고 있다. 그 LP를 샀던게 내...

Kiss the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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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ris Blinov, Rain, 1997] 비에 어울리는 음악은 흔하지 않다. 곧게 내리는 그 형상만큼이나 비는 소리를 동반한다. 창문 너머로, 혹은 캔버스의 저편에서 보여지는 비는 마치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듯 그렇게 보여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소리로 모습으로.. 그렇게 비는 우리에게 다가선다. 하지만 가끔씩, 비는 그러한 소리를 내게 보내오지 못하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정말로 적절한 음악이냐가 어려울 뿐이다. 단순히 비올때 들을만한 음악이라면 당장이라도 수십곡을 댈 수 있겠지만 비오는 것을 보고있는 바로 그 ‘순간’에 어울리는 곡은 그런 음악들 중에서도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림속 비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겪는 일상은 바로 그러한 ‘순간’ 이지만 음악은 ‘순간’이 아닌 ‘시간’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비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은 날은 이처럼 기쁜 것이겠지만. 가을은 비가 온다는 사실이 상쾌함보다는 우울한 분위기를 내는 계절이지만 이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으로 비의 소리를 대신하고 누군가와 함께 거리를 거닐 수 있다면, 가을비라는 단어가 주는 감성이 그렇게 우울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Boris의 그림속 두 남녀의 옷차림과 풍경은 쌀쌀한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이 그림이 따뜻하게 보이는건 아마, 그 둘이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 Kiss The Rain. 언젠가...그 언젠가가 ‘지금’ 이 되는 그 날엔 바람이 불지 않아 곧게 선을 긋는 차분한 가을비가 내리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인걸까?

Puzz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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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맞지 않는 조각때문에 고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잡고 있다 보면 결국은 완성되는게 퍼즐 맞추기이다. ... 하지만 이런 퍼즐 맞추기에 가끔씩 비교되는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은 퍼즐 조각이 몇개씩 없기도 하고, 똑같은 조각이 몇개씩 있기도 한 법인가 보다.

Omnib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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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하늘을 어둡게 하던 비구름이 물러갔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울의 마천루 사이로 파란 하늘과 상쾌할만큼 차가운 공기, 그리고 당연하지만 따가운 햇살이 여름의 초입을 그려내고 있다. 여름이라기 보다는 늦가을 차가와지는 공기와 따가운 햇살의 마지막 경주를 보는 듯한..그런 모습이다. 유일하게 그때와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나뭇잎의 색이 점점 푸르러 지고 있다는 사실뿐. 지금은 7시가 조금 넘은 저녁 시간이고 아직도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목의 저녁이 항상 그렇듯이- 한낮의 뜨거움을 긴 아쉬움으로 남기고 있다. 그리고 반팔을 입기엔 조금 쌀쌀한 바람이 뜨거워진 아스팔트를 식혀주며 상괘함을 전해주고 있다. 마치 Kevin Kern의 음악을 듣는 듯한 경쾌함과 함께. 지금의 이 순간을 사랑한다. 의무감에 해야하는 일도 없고, 누군가와 만나야 하는 약속도 없는 저녁시간이 날 기다리고 있고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는 누구도 불만을 갖지 않을만큼의 상쾌함이 밀려들고 있고 스피커에선 요란스럽지 않은 경쾌함이 흐르는 지금의 이 시간을. 현재가 경쾌하며 편안한데 굳이 과거와 미래로 아픔과 희망을 떠올리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소리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때 삽입곡의 선율을 따라가느라 눈앞의 화면을 놓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는 영화의 장면보다 영화음악과 그 음악의 분위기를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어려서 어머니께 받은 교육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만화영화인 ‘미키 마우스’ 와 ‘딱다구리’를 볼때면 어머니께선 옆에서 항상 배경으로 나오는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또 집중해서 들을 것을 요구 하셨었다. 대부분이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었는데 그때문에 내가 지금의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는게 타당한 설명이겠지. 음악을 들어도 여러 장르의, 여러 음악가의 음악을 듣는 것은 못한다. 한가지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그 선율에 내 감정이 따라가기 때문에 여러 분위기의 여러 음악을 들으면 내 감정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

바람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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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가 없는 것을 본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환상 이라고도 부르고 혹은 신기루 라고도 부르지만 어쨌든 그 이면에 따라다니는 근본적인 바램은 형태가 없는 그것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형상을 부여해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바램은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고 옛 이야기속의 주인공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간혹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하나의 사물로 인식이 되기도 한다. 드물긴 하지만. 그러한 바램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사물로 ‘바람’ 이 있다. 바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다. 누군가 바위를 굴린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는 것처럼 공기가 기압차에 의해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이름을 부여해서 부른다는 것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독 ‘공기’ 라는 존재의 흐름에 의미를 부여했고 ‘바람’ 이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게 이름을 부여했기에, 바람은 우리에게 고정된 감상과 형태에 대한 인식을 주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에대해 우리가 익숙해질 정도로. 바람은 생명을 키우고, 기온을 유지시켜 주며, 간혹 모든것을 부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리’ 를 낸다. 바람은 공기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고 공기가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임을 고려해볼 때 그 매질 자체가 소리를 낸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다.(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연과학도라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할지는 모르지만. :-) 바람이라는 것이 고정된 형상이 없기 때문에 생각하기에 따라 ‘바람의 소리’는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바람의 소리라는 것은 없다. 바람이 무엇인가에(관악기가 될 수도 있고 대나무 숲이 될 수도 있는) 휘돌아 가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바람만 있다고 해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바람의 소리 라는 것은...

7년

어렸을 때 유난히 이사를 많이 다녔던 우리 집이지만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던 시기부터는 단 한차례도 이사를 가지 않았고 그나마 이사를 다녔던 시기도 걸어서 30분 안쪽의 동네들 안에서(적어도 내 기억에는) 다녔던 것이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수년만에 찾아왔을때의 느낌 같은건 경험에 없다. 그리고 정말 우연찮게도 오늘 난 그런 경험을 했다. 95년 겨울부터 96년 겨울까지 정말로 많은 횟수를 찾았던 동네를 오늘 다시 찾아 갔다. 처음으로 그 동네를 찾아갔던 것과 비슷한 시간대에 두번째 찾아갔던 것과 유사한 이유로. 7년전에 걸었던, 그리고 유난히도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길, 골목등이 다시금 눈에 띠면서 느끼는 감정들. 그건 반가움이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찾아온 그곳이, 비록 골목 어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과 가게들은 변했지만 풍기는 느낌과 구조가 변하지 않은채로 그냥 있다는 것은 정말로 반가운 일이었다. 괜스런 즐거움에 주위를 자꾸 두리번 거리게 만들 정도로. 언젠가의 글에도 썼지만 기억이라는 것은 감정의 해석이다. 7년전에 겪었던 그 많은 일들에 대한 지금의 내 감정이 평온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 곳의 기억이 반가움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마 좀더 과거였다면 그건 굉장히 괴로운 풍경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는걸 보면 더욱 확실하게. 하지만 그러한 생각의 흐름과 무관하게 반가움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드는 건 분명한 사실이므로 애써 그러한 즐거움을 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무엇이 지금의 날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분명 납득하기 어려웠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는 이해하고-납득해 버리는 이 모습은. 그리고 덕분에 난 나쁜 기억이 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지금 이순간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있다. 물론 먼 훗날 지금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서 어째서 그때 그렇게 바보같이 굴었는지를 화낼지도 모를 일이지만 중요한건 현재지 미래에 내가 어떻게 느깔까를 고민하는 건 미래의 나한테나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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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사용하던 크레파스에는 하늘색' 이라는 색이 있었다. 옅은 파란색이었을 뿐인데 그 크레파스에는 분명하늘색’이라고 적혀 있었고 모두가 하늘을 칠할 땐 그 크레파스를 이용해서 색칠을 했기 때문에 항상 가장 먼저 닳아 없어지는 종류의 크레프스들 중 하나였다. 주황색을 놓고 가끔 오렌지색이나 귤색이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 색은 옅은 파란색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부르지 않고 항상 하늘색 이라고 불렀었다. 왜일까? 생각해보면, 하늘은 고정된 색을 지니고 있지 않다. 시각에 따라, 그리고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게 본다면 차라리 카멜레온의 색이 무슨 색이냐는 정의를 내리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색은 항상 옅은 파란색이라고 모두에게 인식되어 있었다. 내가 대학에 오기까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동아리 후배 한명의 아이디를 접하기 전까지 내게 있어서도 하늘색은 그저 고정적인 색일 뿐이었다. 어렸을 때 그림대회에 억지로 나가면 특이하게 그리는 것이 입상에 유리하다며 손발은 크게, 사람 얼굴이나 다른 색은 내가 실제로 보는 것과 다르게 그리도록 강요 받았을 경우에나 다른 색으로 칠했을 뿐이다. 그 후배의 아이디는 내가 하늘색 이라고 느끼고 있던 색과 어찌보면 같은 뜻이지만 어감은 전혀 다른 단어인 `하늘빛’ 이었다. 한번도 하늘의 색을 `빛’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본 적이 없었고 그런 표현을 접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그 단어는 무척이나 싱그러운 느낌으로 찾아왔다. 하늘색 과 하늘빛 하늘빛은 고정적이지 않은, 단순한 크레파스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이다. 크레파스 하나로 칠할 수 있는 하늘색 처럼 빛을 흡수해서 색을 내는 물감이나 크레파스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이다. 샐로판지처럼 빛을 투과시키는 성질에 의해 표현되는 그런 빛이다. 오늘 하루종일 고민을 했다. 하늘빛 을 영어로 표현하면 어떤 단어가 될 것인가. lucid 정도면 적당할까. 가을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며칠째 서울 하늘이...

늦장마

어느덧, 매미소리가 잦아들어가면서 귀뚜라미 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인식시키기라도 하듯, 차가운 공기와 함께 비가 오고 있다. 혹자는 늦장마라고 부르기도 하는, 여름의 마지막 인사가. 유난히 더운날이 적었던 여름이었다. 온 세상이 떠내려 갈 것 같은 폭우도,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던 열대야도 없었다. 더울만 하면 비가 내려 이 도시의 열기를 식혀버리고, 그렇다고 긴 장마를 지나치지도, 여느해처럼 쉴새없이 올라오는 태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이 태풍이 일본열도로 갈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에 상륙할 것인지를 마치 스포츠 중계방송 보듯 했던 시기도 없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참 “조용히” 지나간 여름이다. 남부지방은 비피해도 제법 있었다지만, 내 체감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일들을 억지로 인식하려 애쓰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그래서일까? 조용히 지나가던 여름이 아차 싶어서 늦게나마 장마를 불러오고 있는 이유가. 며칠째...근 일주일이 넘도록 우중충한 하늘과 연일 쏟아붇는 빗줄기를 봐야만 했다. 공식적인 장마철에마저 이런 모습은 보지 못했었는데. 그래도 덕분에 서울 하늘의 먼지들이 많이 씻겨졌는지, 간간히 개인 하늘은 가을하늘이 무색할 만큼 파랗고 예뻤다. 지나치게 많이 나온 수리비 견적으로 수리를 포기해 버린 내 카메라가 아쉬울 만큼..그만큼 예뻤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다. 이 비가 끝나고 나면 이제 가을이 시작될 거라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입밖으로 내어 말한다고 구박할 수도 있지만, 세상엔 사랑과 같이 다 아는 사실도 소리로 변화시켜 내보내야만 다가오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고 그냥 멀어져 버리는 것들도 있다. 다시금 다가오긴 하지만, 계절은 분명..그런 존재다. 입밖으로 내지 않으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쳐서 멀어져 버리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매년 가을이 오면, 난 계절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계절을 멈추고 싶다는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 계절이라는 ...

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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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인가 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제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라고. 그러면서 고향 집에서 보이는 곳에 있는 나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정말 우습게도, 그런 생각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는 느낌, 기다려지던 매미 울음소리, 바람이 불때마다 들려오는 커다란 활엽수들의 음악까지도. 그저 덥다는 생각과, 에어컨 바람이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 연구실과 집을 오갔을 뿐이다. 깨달음은 순간에 찾아온다. 책을 한권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나오기 위해 도서관의 회전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랄만큼 커다랗게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뒷사람이 회전문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내 등을 가볍게 밀 때까지의 그 짧은 시간동안 난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채 멍하니 서있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매미 울음 소리가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 것이. 혹시 내가 도서관에 들어갈때까지는 매미들이 울지 않고 있었다가 공교롭게도 내가 도서관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 맞춰서 울기 시작한걸까? 상식적으로 그럴 확률은 너무나 작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언제나 그래왔다. 지금 내 방의 달력이 아직도 6월인 것처럼, 난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 하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만큼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1999년 겨울이 다가오는 것 역시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고 이번에는 2003년의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그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면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달력이 한달전것이니 양호한 편이다. 심할때는 세달 전인 경우도 있었으니까. 시간이 이토록 의식의 뒷면을 타고 몰래 흘러 버린다는 사실이 너무나 즐겁다. 누가 했던 말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은 돌아보며 아쉬워 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지나쳐 보내야 할 대상이다. 어느책에 나와있는 말인지는 아니까 누구의 말인지 마음만 먹으면 정확한 문장과 함께 찾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다. 시험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온 세상을 덮어...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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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마치 죽는 것 처럼 보일거야.”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여러해 전인 생땍 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 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린왕자가 노란뱀에 의해 그의 소혹성 B612호로 되돌아 가기 전에 ‘나’ 에게 이야기 하는 말중 하나이다. 죽는 것 처럼 보일거야. 나이가 들수록 큰 감동으로 읽었던 소설은 몇개 되지 않는다. 하루키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 이 소설들 중에 가장 많은 횟수의 정독을 이끌어 냈지만 그 소설을 처음 접한 건 1996년 가을 이었고(그러고 보니 빌린 책인데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원 주인은 돌려받고 싶은 생각이 있을까?) 물론 그 소설역시 읽을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주곤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몇년마다 한번씩은 꺼내서 읽게 되는 소설이라면 단연코 ‘어린왕자’ 이다. 지금껏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본다면 내 생에서 나한테 가장 큰 영향을 준 소설은 바로 이 소설이 아닐까? 내 노트북을 켜면 로그인 화면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Welcome to minor planet B612 오늘 아침에 문득, 어린왕자의 여러 장면들이 생각이 났고 배경화면을 바꾼 김에 노트북의 이름까지 B612호로 변경했다. 지금껏 부르기 쉬운 명사로 해서 인격을 부여해 왔던 것에 비하면 부르기도 까다롭고 ‘어린왕자’의 내용에서도 나왔듯이 전혀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아서 이름조차 없고 그저 식별번호로만 불리우는, 그런 존재처럼 되어 버리긴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만족감에 하루종일 내 노트북을 바라보면서 흐뭇해 했다. 공교롭게 지금은 홍순관님이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 을 가사로 해서 부른 동명의 노래 ‘귀천’ 이 흘러 나오고 있다. 어린왕자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려 보니 참 잘 어울리는 노래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달력을 보니 어느덧 5월이다. 이미 현재가 5월임은 알고 있었지만, 내 방 책상에 앉아 정면에 걸려있는 달력을 보니 아직도 4월이었다. 그리고 그에대한 반작용으로 난 현재가 5월임...

Nowhere in Africa

언제부터인지 해가진 후의 노천극장에서는 오카리나 소리가 들려온다. 한적한 휴일 오후나 주말 저녁이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앉아서 오카리나를 불기 시작한지가 벌써 꽤 된 듯 하다. 그게 한명인지, 아니면 몇명이서 부는 거라서 매일같이 부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은 없기 때문에.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는 일상의 작은 사건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 순간만 고개를 갸웃하면서 바라볼 뿐 잠시후면 까맣게 잊어 버리곤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강하게 인상이 남았다. 자전거를 타고 노천극장 옆의 비탈길을 빠른 속도감을 느끼며 내려가다가 무심코 브레이크를 잡고 속도를 늦출 만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몇시간이 지나버린 지금조차도 귓가에 그 소리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을 만큼 내 마음에 불쑥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있다. 조금전에 노트북으로 본 영화 때문에 더욱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Nowhere in Africa. ‘어바웃 슈미츠’ 이후에 또다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를 접했다. 그렇게 본다면 최근에는 영화를 보면서 수확이 많은 것 같다. 비록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작품들이지만. 영화의 중요 장면마다 -정상적인 시점이라면 중요한 시점이라기 보다는 뭔가 다른 의미를 지닌 곳이지만 그런 장면마다 특정한 음향효과를 내는걸 보면 감독역시 의미를 부여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등장하는 나이어린 소녀의 허밍 두소절. 학교에서 내려오는 길에 멈춰서서 들었던 오카리나 소리와 겹쳐서 들려왔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간혹, 몇해전의 국토종주때처럼 모든것을 잊고 그저 걷기만 했으면 싶을때가 있다.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상실의 시대’ 에 나오는 와타나베와 구미코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서 먼 곳으로 대학을 진학했듯이. 그렇게 생각하니 그 소설속의 그들은 같은 시기의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고 또...

쟈스민, 꽃을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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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산 쟈스민이 꽃을 피웠다. 쟈스민을 샀다는 말에 친구가 인터넷에서 찾아준 재배법에는 쟈스민의 개화기는 7,8월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꽃이 가장 많이 팔리는 봄철에 내놓기 위해 하우스에서 키워온 꽃들에게 계절은, 크게 상관이 없는 듯 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덥던 며칠의 시간이 지난후에 태어나서 처음, 내 손에서 꽃을 피운 화분을 보았다. 어느날 아침에 맞이한 그 경이로움. 그 경이로움을 기억속에 강제하고자 사진을 찍었지만 과연 그것이 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생각이 많다. 지나가 버린 사건은 ‘과거’에 남겨 두어야 하는것이 아닐까. 과거를 현재에 속박 시키면 그것은 미래에 고통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이런 꽃에 대한 기억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살고는 있지만, 머리속을 파고드는 한가지 생각은 사라지질 않고 있다. 모든것이 확실해져서 더이상 이런 시간들을 겪지 않아도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과거는 과거일뿐, 현재에 속박해서는 안된다는걸 나 자신이 이해가 아닌 납득을 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Pen &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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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졸업을 하던 그 해 겨울방학이 내게는 참 특별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항상 집에서 사주는 것만을 읽었던 아이에서 내가 읽고싶은 책이 있으면 서점에 가서 죽치고 앉아서라도 읽어야 하는 아이로 바뀌었고 그때문에 집에서 처음으로 등록해준 학원을 한달이나 빠져야 했다. 자연스럽게 아침마다 학원앞을 지나쳐서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시내까지 걸어가 서점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아서 책을 읽다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그 서점의 출입구를 딱 막아 버리고 내가 그 안에 있는 책을 모두 다 읽을 때까지 나 혼자만 그 서점을 소유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책을 좋아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책을 좋아했기 때문일까? 학교에서 시켜서가 아닌 혼자 쓰고 싶어서 처음으로 글 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무렵이었다. 수필이나 다른 것도 아닌 ‘시’ 였다. 멋진 시라는 것은 아름다운 어휘만을 골라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하나가득 내 생각에 아름다운 단어들만을 골라서 채워 넣었던...참 유치했던 시였지만 그 시로인해 난 내가 쓴 글을 통해 내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말 절묘하게도 내가 진학했던 고등학교에는 내가 살던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 문학회가 있었다. 그리고부터 만으로 꼭 10년이 흘렀다. 그때 이후 내가 가장 많은 소재로 삼아왔던 사물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본다면 난 두말하지 않고 ‘비’ 라는 사물을 이야기 할 수 있다. 물론 감정이나 전반적인 풍경이 아닌 단지 어떤 사물 자체를 내 글의 소재로 삼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 글의 가장 큰 소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난, 비가 온다는 것에 대해 유난히도 많은 감흥을 느끼는 것일가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비에대해서 나만큼의 감흥을 느끼는 것일까. 정말로 오랜만에 시원하게 비가 오고 있다. 며칠동안 오후의 햇살은 오히려 따뜻하게 느낄정도로 날이 덥기도 했...

DA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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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일찍 움직여야 한다는 전제조건의 적용을 받지않는 일요일이다. 일어나긴 평소와 같이 6시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한시간 반이 넘도록 계속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침이니까 신나는 음악을? 나한테 그런 음악이 있는지 의문이다. 하드디스크에 무작위로 들어있는 mp3 파일중에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배의 컴퓨터에서 목록도 확인한하고 3기가 정도로 긁어온게 전부니까 아마 들어있긴 하겠지. 하지만 그 파일들은 잘 듣지 않는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그 선배와 난 음악적 취향이 대단히 다르고 그런 관계에 놓여있는 사람이 일부러 모아놓은 음악 파일중에 마음에 드는게 많을리가 없다. 결국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파일들을 찾아야 했다. 실시간 음악방송 사이트들은 소용없다. 윈도우 전용으로 구성된 그 홈페이지들을 리눅스 환경을 사용하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Dawn. 우리말로 번역하면 새벽, 여명 뭐 대충 그런 뜻이다. 다른나라 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는 최근 들어 절실히 깨닫고 있다. 아무리 정확하게 옮겨도 옮길 수 없는 것이 언어이다. 문득 창 밖을 봤고, 내 방 창문에서 새벽의 풍경을 바라본게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 떠올렸다. 더욱이 눈이 덮인 서울의 새벽을. 서울은 대도시 답게 눈이 잘 오지 않는다. 아마 어지간한 눈은 모두 내리다 녹아 버리겠지. 이 도시에서 소모해 버리는 열은 주위의 환경과 자연을 수십억번 바꾸고도 남을 만큼일테니까. 그렇게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새벽..이라는 단어가 아닌 dawn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중에 dawn이라는 단어와 연관이 있는 것이 있던가? 우습게도 Third dawn이라는 부제로 발매된 온라인 게임인 Ultrima online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그다지. 결국 웹사이트를 뒤지며 다녔다. 내가 기대했던 글이나 풍경보다 상업적인 사이트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의 검색 사이트에서는 의외로 새벽 기도회 같은 종교적인 사이트들이 눈에 띄었지만 종...

쵸콜렛 우체국

어느덧 2월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매년 그렇지만 이맘때가 되면 난방이 되지 않는 건물은 건물 안이 밖보다 훨씬 춥다. 해가 제대로 들지 않는 위치의 경우라고 한정을 지어야 하지만 내가 지내는 곳은 한낮이 되도 해가 정확하게 드는 정남향은 아니기 때문에 제법 추위를 느낀다. 그리고 커피를 한잔 하러 건물 밖에 있는 벤치에 나와 앉을 때마다 오히려 밖이 더 따뜻하다는 사실에 문득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입춘도 지났고 이제 경칩만을 기다리고 있는 요즘. 봄이 오고 있다. 밤이 제법 늦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에 돌아와 창문을 열어놓고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창문이 활짝 열리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 시간에 창문을 열어두고 있을 수 있게 된게 언제쯤인지 모르겠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적당히 시원해서 무척이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고 있다. 한밤중에 상쾌함을 느낀다면 그것만큼 어색한 표현이 없겠지만 냉기가 묻어나는 아침의 상쾌함보단 요즘이라면 차라리 밤늦은 공기의 상쾌함이 더 깔끔하다고 난 믿는다. 어쩌면 그러한 기분좋음에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음악이 있었으면 싶지만 리모콘이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 움직이기 귀찮다. 그냥 창밖으로 들려오는 자동차들의 소음을 음악으로 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아직도 참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구나 싶다. 온 세상이 쵸콜렛으로 뒤범벅이 되는 발렌타인 데이가 지나갔다. 정확하게 말하면 쵸콜렛을 포장하기 위한 바구니와 상자들이 더 난리지만. 팬시점 들을 지나가다 보면 거리에 하나가득 내놓은 발렌타인 데이용 바구니와 상자들 때문에 시선을 잠깐씩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SIMPLE” 이라는 영어 단어로 표현이 가능한 내 기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난 그렇게 복잡하고 화려한 바구니로 치장된 쵸콜렛 보다는 쵸콜렛 자체를 그냥 깔끔하게 포장해서 받는 선물이 더 좋을 것 같다. 언론에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