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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활 9년차

2018년 6월 22일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국으 떠나 미국에 랜딩했으니, 오늘로 꼭 8년을 채웠다. 뭔가 길게 이야기 할 거리가 있다는 느낌과, 그냥 와인 한잔 하면서 취해있고 싶다는 기분이 모두 든다. 그런데 두가지 모두 오늘은 어렵다. 그래서 그냥 이 한마디.  내일부터는 미국 생활 9년차.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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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high 강을 따라 형성된 트레일을 따라 45마일 자전거를 타고 왔다.  계곡 사이에 난 트레일이라 그늘도 많고 길도 좋아서 자전거 타기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포코노 근처에서 트레일을 벗어나 평화의집 수녀원에 들려 점심을 얻어 먹었는데, 수녀님들께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주셔서 과식을 한 탓에 돌아올때는 좀 버거웠다.  그런데 이 날 자전거 타면서 진짜로 힘들었던건 무릎이었다. 둔근도 약해지고, 체중도 늘었고, 관절을 감싸고 있는 여타 다른 근육들도 모두 약해졌기 때문일텐데 라이드 끝 무렵에 무릎이 overuse 된 듯 통증이 찾아왔다. 사실 이날 처음 느낀건 아니고, 특히 작년부터 느끼고 있는데 전에는 아무 문제 없이 수월하게 자전거로 주파했던 트레일이 완주하고 나면 무릎에 부담을 느꼈다.  이걸 극복하려면 더 많이 운동하고 이제는 근력 운동도 제법 해야 할텐데 시간이 마땅치 않다. 핑계라면 핑계인데, 정말 그렇다. 어쨌든 매일 스트레칭을 좀 더 하고 하루라도 운동량을 늘리려 애를 쓰고는 있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런지.  다른건 몰라도 자전거는 최대한 오래 즐기고 싶다. 60대가 되더라도, 70대가 되더라도 이번 처럼 경치 좋은 트레일에서 적당한 속도감을 느끼며 운동하기에 자전거만한 수단이 없으니까.  

여우

  막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길에 길 옆을 총총 걸어가고 있는 여우를 마주쳤다. 운전석에 있는 나는 못봤는데 조수석에 앉아 있던 막내가 먼저 발견했다. 입에 뭔가를 물고 있었는데 사냥에 성공해서인지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막내와의 대화는 저 여우가 '그 여우' 인지에 대한 쪽으로 넘어갔다. '그 여우' 가 뭐냐 하면, 얼마 전에 막내가 다니는 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수풀에 자리를 잡고 새끼를 낳아 기르기 시작한 여우를 말한다. 사람을 공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생동물 보호 센터에서 생포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게 금지되어 있어서 새끼를 다 길러 떠날때까지 그대로 두는 수 밖에 없다는 안내를 받았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여우가 새끼를 키우는 수풀 가까이 가지 않도록 지도하고 있으나 아이들이 말을 들을 리 없다. 이 여우도 사람에게 공격적이지 않고 꼭 길고양이처럼 굴어서 대담한 몇몇 아이들은 여우를 쓰다듬어 준 적도 있다고. 선생님들은 뒷목 잡을 이야기지만 아이들 사이에선 영웅담처럼 돌아다닌다. 막내와 내가 오늘 아침 여우와 마주친 곳은 학교에서 길 하나 건너면 되는 곳이고 보금자리로부터 따져도 0.5마일 정도 거리라 충분히 그 여우일 수 있다. 재작년부터 여우를 마주치는 경우가 느는데 아무래도 여우들이 돌아온 것 같다. 이 동네에 처음 왔을땐 토끼들이 그렇게 많았다. 그러다 고양이와 여우가 늘면서 토끼가 줄어들더니 이어서 여우도 사라졌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다시 토끼들이 많이 보인다 싶더니 여지없이 여우들도 늘고 있다. 내년 정도면 처음 왔을때만큼 토끼가 많아지고 여우도 많아질 것 같은데, 햇수로 따져보니 이 동네에 온지 7년을 꽉 채웠고 이제 8년차로 접어든다. 야생의 먹고 먹히는 관계가 변화를 거쳐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그 정도의 시간은 걸리나보다. 그러고 보니 다음달이면 미국에 넘어온지 8년을 채우고 이제 9년차에 접어든다. 10년 살면 집 같이 느낀다고 하던데 정말 그러려나. 시간 참 빠르다.

블루제이

블루제이는 남서부를 제외한 북미 대륙 대부분에 넓게 서식하는 텃새로 뉴저지에서는 흔히 보인다. 예쁘기는 한데 자주 보다 보니 점차 별 신경 안쓰게 되는 그런 흔한 텃새. 그런데 막내는 블루제이를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에 나오는 그 파랑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블루제이를 보면 행운이 뒤따를거라고 믿는다. 오늘 아침 학교 오케스트라 연습을 위해 일찍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내가 오늘이 벌써 5월이네 하고 지나가는 말을 던졌는데 막내가 4월에 블루제이를 다섯번이나 봤으니 이번달에는 우리 다섯 식구 모두에게 좋은 일이 한가지씩 생길것 같다는 말을 했다. 아이의 말에 손뼉까지 쳐 주며 공감해줬다.  그래, 오월에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좋은 일이 한가지씩 꼭 생길거라고 믿어보자.

심란

첫째의 상태가 다시 나빠지고 있다. 그 동안은 컨디션의 기복은 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 우상향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최근엔 우하향 하고 있다. 지난 반년은 컨디션이 나빠도 짧게 끝내고 다시 회복이 되었다면 지금은 회복이 되지 않고 계속 나쁘지고 있는 모습니다.  어느정도는 기복이 있으리라는건 알고 있었고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 달리 깊고 거대한 down turn 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무겁다.  어제부터 아내와 저녁 묵주기도를 시작했는데 기도의 힘이 아이를 잡아줄 수 있기를.

첫째의 연극 무대, 그 기적같은 시간

어제 저녁, 그동안 고생하며 준비한 첫째의 연극 무대가 있었다. 무대 의상 준비팀이었던 아이는 그동안 매일 밤 늦게까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공연 전날 마지막 dressed 리허설을 마친 뒤 디렉터가 의상을 수정하라는 폭탄을 던져서 공연 당일 무대에 배우들이 서기 직전까지 제대로 밥도 못먹고 의상팀 아이들과 함께 의상 수정을 해야 했다. 공연 당일. 첫째는 일찌감치 학교로 다시 갔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공연 시간에 맞춰서 다 함께 이동했다. 꾸준히 연극/뮤지컬 팀에서 활동해온 둘째 덕분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의 공연은 여러차례 관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고등학생들의 연극은 중학교까지와는 달랐다. 공연 수준도 무척 높았지만 중학교까진 선생님들이 주도가 되어 진행된다면 고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모든걸 책임지고 진행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안전관리 정도. 연출과 연기 지도는 물론이고 포스터 제작을 포함한 각종 홍보, 무대 장치 제작, 의상, 음악, 음향효과 및 조절, 무대 배경으로 쓰이는 영상 제작(무대와 연계시켜 자연스럽게 만들었는데, 마녀가 연기와 함께 새로 변신해서 날아가는 장면-실제로는 연기에 배우가 몸을 숨기고 연기에 가려진 스크린 부분에서 새가 나와 화면 너머로 사라지는 연출-은 정말 감탄을 했다)을 비롯 티켓 판매부터 공연 운영까지 모든걸 아이들이 진행했다. 심지어 브레이크 시간에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 팀도 따로 있었다. 티켓은 현장 구매도 가능 했지만 사전에 온라인으로 예매를 하지 않으면 좌석을 미리 지정할수 없기 때문에 미리 티케팅을 했다. 공연은 총 네 번, 목/금요일은 한번씩, 토요일은 두 번 하는데 공연마다 좌석이 거의 다 찰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지역 소식지에 광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첫째가 다니는 고등학교에는 몇 개인지 다 알기 어려울 정도로 클럽이 많은데 각 클럽들의 활동 수준이 높다. 영상 제작을 하는 클럽도 있고 방송 촬영을 하는 클럽, 비즈니스 경영/마케팅 클럽, 음악 등등 정말 수없이...

벽난로

잠이 깼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다시 잠들기엔 어정쩡한 시간. 새벽은 아니지만 이른 아침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오늘이 토요일이니 평소 같으면 침대에서 나와 이래저래 짐 챙기고 자전거를 차에 실으며 분주하게 주말 아침 라이딩을 준비했겠지만 생각보다 이른 추위와 얼마 전부터 말썽인 오른쪽 무릎은 추운 날씨에 나가서 라이드 하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그대로 누워서 휴대폰을 보며 한참 시간을 보내다 문득 벽난로나 미리 지펴 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일어나서 거실에 내려왔을 때 활활 타고 있는 벽난로와 함께 훈훈한 거실이 기다리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유일한 문제라면 뒷마당 장작 거치대에 있는 장작을 거실로 옮겨야 한다는 귀찮음인데 그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만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오니 고양이들이 반긴다. 하지만 거실을 데우려면 고양이들과 놀아주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 길로 뒷마당으로 나가 장작 거치대에서 장작을 주워드는데 문득 하늘을 보니 제법 날이 밝아온 뒤였다. 사진을 찍을까 했는데 폰을 안 가져왔다. 서둘러 정작을 한 아름 끌어안고 거실로 돌아와 불을 지폈다. 벽난로에 장작과 스타터를 쌓아서 불을 붙이고 어둑어둑한 거실이 벽난로에서 나온 붉은빛으로 조금 밝아지는 걸 확인한 뒤 서둘로 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타오를 것 같은 선홍빛 하늘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낮게 내려앉은, 하지만 서로 다른 두 무리 구름의 결이 잘 보일 정도의 빛과 분홍색 아침 햇살이 고운 하늘이었다. 사진을 찍고 잠시 서서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다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리 겨울 초입이라고 하나 얇은 옷 한 겹 있고 서있기에 11월 중순의 아침 추위는 만만치 않다. 거실로 돌아오니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가 반기고 있다. 이제 잠시 시간을 주면 훈훈한 온기가 돌겠지. 거실 불을 따로 켜지 않고 냉장고에서 아내가 만들어 둔 에그 샐러드를 꺼내와서 옆에 놓고 앉았다. 이제 가족들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 따뜻한 벽난로의 온기와 불빛이 일렁이는 어둑한 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