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반 혹은 버튼 한 개
혼자하는 여행의 즐거움은 아무래도 낯선 곳으로 간다는데 있지 않나 싶다. 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래서 내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곳으로 향한다는 사실에 매력이 있지 않다면 무엇에 매력이 있을까.
3년만에 정동진에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의 일반화된 생각으로는 정동진이라면 기차를 타고 가야겠지만 당일치기로 다녀올 생각을 하고있는 차에 6~7시간이나 걸리는, 그것도 밤기차를 타고 갈만큼의 여유가 허락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버스를 타고 강릉까지 가서 거기서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정동진에 도착했다. 예전의 그 꼬불꼬불한 대관령을 수년간의 공사를 거쳐 7개의 새로운 터널과 수많은 다리를 이용해 거의 직선으로 만들어 두었기에 서울에서 4시간은 족히 걸리던 강릉까지 직통은 2시간 반 그렇지 않고 중간중간에 서는 시외버스를 타면 3시간여가 걸릴 만큼 단축이 되어 있었다.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단 한차례의 급커브도 없는 도로를 보면서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가끔 높은 고가다리를 지날때 아래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옛길에서 그 흔적을 찾을 뿐이다.
원래가 탄광촌이었던 곳, 정동진.
원래가 매마르고 척박한 곳이었던 이곳에 매마르고 척박한 마음을 둘 곳을 찾지 못해 찾는 사람이 나 뿐일까. 하지만 굳이 매스미디어의 힘에 대한 언급이 없더라도 이제 그곳에서 석탄가루를 발견하기란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정동진역이 목적이 아니었던 까닭에 입장료를 내고 해변으로 내려섰다. 여름바다나 겨울바다와 달리 봄의 바다는 따뜻함에 그 존재를 드러낸다. 겨울바다처럼 차갑지도, 여름바다처럼 뜨겁지도 않은 백사장에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거니는 많은 연인들의 모습에서 푸근함을 느끼는 것은 나뿐이 아닐거라 생각이 들었다. 북적거림과 썰렁하다는 단어 사이의 `한적한’이라는 느낌에 취해 나역시 신발을 벗어들고 발목을 간지럽히는 파도와 백사장 사이의 경계를 걷고 싶었지만 목적지가 그곳이 아님을 상기하면서 그저 신발밑으로 느껴지는 모래의 사박거림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길게 늘어선 해변을 지나 조각공원으로 들어섰다. 사진기를 가져갔다면 그 사이에 있는 여러 모습들을 기록으로 남겼겠지만 흐린 날씨에 지레 겁을 먹고 맨몸으로 갔기에 기록이 아닌 기억으로 남길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조각공원으로 가는 와중에 만나는 모래시계.. 모래가 모두 떨어지면 정확하게 1년이 지난다는 커다란 그 시계의 모습은 영상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에 충분했다. 조각공원의 배모양 카페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며 마신 한잔의 차, 오롯히 나있는 산길에 여러 형상들의 장승들을 늘어놓아 마치 장승들의 축제에 초대되어 가는 듯한 장승길 그리고 조각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의 돌에 적혀있는 여러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까지. 모두가 따뜻하게 어루만져지는 것들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흐릿한 풍경을 몇시간이나마 잊을만큼 충분하게. 하지만 그곳에 있던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결코 내가 도달했던 장소에 함께 도달하지 못했으리라. 도달했다 하더라도 나와는 다른 모습을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곳은 따뜻함이라는, 나만의 형이상학적 장소였으니까. 사람이라는 약간은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는.
서울로 오는 버스는 정확하게 2시간 반의 시간의 흐름뒤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난 그녀가 불룩하게 만들어 버린 가방과 손에 남아있는 부드러움과 그녀가 매워버린 또 한군데의, 이젠 잊혀진 상처의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가 내 모든 상처를 매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기대일까. 집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누른 전화기의 단축 버튼. 온갖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이 난무하는 요즘 거리를 거리 자체로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2시간 반 혹은 버튼 한 개. 그 이상은 결코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