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땡기는 날

아침에 해프닝이 있었다. 공급 업체 한곳과 지난 몇주간 협상하던 건이 있는데 오늘 아침 그 업체에서 그간의 협상을 무색하게 하는, 도로아미타불 협상안을 제시했다. 우리는 그 업체의 제품을 계속 사야 하는 입장이라 고객이지만 약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그걸 이용한 걸로 보였다.

내가 사전에 소싱팀 디렉터와 이야기를 했던건, 끝까지 이 업체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어쩔수 없이 일단은 진행하되 업체 변경을 준비하자는 것. 미리 이야기 되어 있는 만큼 그 메일을 받자 마자 CEO에게 보고하고 더 이상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진행하되 업체 변경을 장기 전략으로 지금부터 준비하자고 했다. CEO가 동의해서 내가 그 업체에 직접 회신을 했다. 오케이 하자고.

문제는 그 이후에 벌어졌다. 소싱 디렉터는 왜 자기와는 일언반구 이야기도 없이 그걸 승인하냐며 난리가 났다. 소싱팀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이렇게 위에서 막무가내로 합의 할거면 자기들이 왜 그 고생을 해야 하느냐면서 거의 불을 토했다. 자기는 어떻게든 더 회사의 이득을 위해 노력하는데 이럴수가 있냐면서.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이 디렉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업체에 자기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메일까지 회신했는데 그 메일을 원래 수신처 전체 회신으로 보냈기 때문에 나와 CEO까지 전부 들어 있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업체에 합의 하겠다고 CEO와 회의를 거쳐 결정해서 보낸 메일을 싹 무시하고 테이블에 똥물을 끼얹은 것 같은 상황. 더구나 CEO가 내 의견에 동의한다고 내부 메일까지 보낸 이후라 CEO도 당황스러워했다.

CEO에게는 내가 정리하겠다고 하고 잠시 생각을 했다. 내 사내 메신저는 그 소싱 디렉터가 보내는 항의 메세지가 계속 올라가고 있는 상황. 10분정도 생각을 정리한 뒤 전화를 했다. 그리고 10분간 고민했던 첫번째 문장을 말했다. "내 실수니 사과한다" 고. 전투 준비를 마치고 나팔 소리만 기다리고 있었을 그 디렉터가 잠시 멈칫 하는 사이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그 상황을 둘로 나눠야 한다고 봤다. 일하는 방식, 즉 방법론적인 부분과 의사 결정의 합리성 부분으로.

내가 업체에 그렇게 회신한 이유는 나는 방향이 사전에 정해져 있다고 봤기 때문에, 그러니까 농구에서 약속된 플레이를 펼치는 상황과 같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CEO에게 업체 변경을 언급하는건 소싱 디렉터가 아닌 VP인 내가 하는게 더 효과적이라고 봤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담당자와 마지막 확인 없이 일방적으로 협상에 합의한건, 더구나 그 담당자가 그런 상황에 대단히 실망하는 성격이라면, 일하는 방법면에서 내 실수가 맞다고 그에게 이야기 했다. 그러니 사과를 한다고. 다만 내가 그의 보스라서 그의 입장과 생각을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아서 그런게 아니라는 점은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차분히, 하지만 길지 않게 했는데 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도 많이 누그러졌다.

그리고 나서 두번째, 의사 결정의 합리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도 경력이 있는 만큼 의사 결정 루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방안을 찾아내는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고 말을 시작했다. 방법론적인 이야기와 내 사과를 먼저 한건 그의 감정을 좀 누그러뜨려 놓을 필요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다 두번째 꼭지에 들어 있었다.

내 의사 결정의 핵심 포인트는, 더 이상 시간을 끄는건 (더구나 양사의 CEO까지 개입되어) 비효율적이라고 봤다는 점이고, 우리가 내세울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것과(즉, 징징거리며 매달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과), 장기적인 파트너로 계속 함께 가기 어려운 업체라는 사실을 알게된 대가를 지불했다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파트너를 찾으려 했을때 내부 저항(정확하게는 그 업체와 10년을 함께 일한 담당 제품의 PM)을 무력화 시킬수 있는 하나의 근거를 갖게 된 거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계약서에 이름을 적는 책임자로써 내가 최정 결정을 하고 책임을지기에 다양한 의견 속에서 누군가 한명이 결정을 해야 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방법론적으로 그 과정이 옳다 그르다를 따질수는 있지만, 그리고 그건 이미 내가 사과를 했지만, 책임지는 사람이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그 행위 자체를 서운해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그리고 분명히 인지하고 있겠지만 Operation VP와 CEO가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고 결정한 사안을 실무자가 동의 못한다고 업체에 반발하는건 회사의 hierarchy 에 문제가 있다는 인상을 내부와 공급사에 주게 되는,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이 부분은 정리를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행이 그도 마지막에 이성은 부여 잡았는지) 업체에 답장을 하며 내 이메일에 답장을 한게 아니라 업체의 첫 메일에 답장을 했으니 내 메일을 보지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지 않겠냐며. 그도 동의를 했고 자신이 정리하겠다고 했다.

예상했듯이 그는 결정의 합리성 여부에 화가 난게 아니라 자신이 소외된 것 같다는 그 느낌에 화가 났던 터였다. 그런 경우 보스인 내가 다른 사족 붙이지 않고 사과를 하는게 그의 상처난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가장 빠른 길이었을 것이고. 그와 대화를 하는 도중 단 한번도 그의 행동에 대한 질책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고 심지어 "너도 소싱팀 직원들과 모든걸 상의하지 않고 디렉터로써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경우 많지 않냐. 경력 20년은 된 사람이 이 무슨 말도 안되는 행동이냐"라는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도 다시 삼켰다. 지적하려 들면 그의 자기모순적인 사례는 열가지도 더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아주 건조하게, fact와 의견을 구분해서 차분하게 이야기 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행동의 잘못을 지적하면 고치기는 커녕 더 감정적으로 반발하게 될게 뻔하니 아예 그런 언급은 꺼내지도 않았다.

CEO에게 상황 종료 메세지를 보내고 잠시 책상에서 물러나 의자에 한참 몸을 기대고 있었다. 아, 와인 땡겨.

유사한 일을 겪을 때마다 항상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결과가 뭔지 고민한다. 이번에 제일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 돼먹지 못한 부하 직원을 어떻게 혼내주지" 였다. 다분히 감정적일 수 밖에 없었던게,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똥물을 끼얹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물이 그를 혼내주고 찍소리 못하게 찍어 누르는 것인지(그러니까 화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당 계약을 체결하는 것인지 생각해야 했다. 이성적인 답은 정해져 있다. 그를 혼내주는건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건 계약 체결이었다. 그래서 그걸 최우선으로 했다. 그 디렉터가 최종 의사 결정에도 자신이 늘 참여하길 원한다면 회사의 프로세스가, 그리고 내가 그럴 수 있는 한 그렇게 해주면 된다. 그게 그를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방법이라면 나는 열번이라도 그에게 엎드려 절 할 수 있다.

그런데 감정적으로는 항상 스스로에게 뒤끝이 있다.

찍소리도 못하게 혼내주고 싶은, 혹은 한마디 멋지게 쏘아 붙이고 싶은 내 감정을 접어두고 마치 chatbot 이 된 것 마냥 대화를 하고 상황을 풀어나갈 때마다 상황이 끝나고 나면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화를 어딘가에 풀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고. 언제쯤 이런 상황에 화도 나지 않는 마음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마침 눈도 와서 퇴근길도 어려울텐데 일찍 집에 가야겠다. 이번 주말은 좀 쉬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