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9, 1949, 948

오늘 별안간 메일박스를 뒤져보고 싶어져서 뒤적거리다 연애하는 동안 아내가 내게 보내왔던 메일들이 저장되어 있는 메일박스를 열어보게 됐다.


이때도 그랬지만 요즘도 우린 서로에게 존대를 한다. 내가 아내보다 다섯살이 많기 때문에 말을 놓기 시작하면 분명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조 어투로 내가 말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교재를 하거나 결혼생활을 하는 사이에 상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라는 건 내 생각과 다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녀석이 아닌가. 미리미리 조심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연애 전까지 서로 반말을 하던 친한 오빠동생 사이에서 사귀기로 한 그날부터 내가 고집을 부렸다. 서로 존대를 하자고. 서로 존대를 해야 싸우더라도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거라는 논리로 어거지를 부렸었는데 결과적으론 싸워보질 않았으니 정말로 그런지 여부는 확인해볼 길이 없었다. 어쨌든 저 메일들은 분명 내가 받았던 편지들인데 읽어보는 중에는 꼭 남의 편지를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재미를 느꼈다. 요즘도 아내는 연애할 때 했던 행동들을 내가 입에 올리면 얼굴이 빨개져서는 이야기 못하게 하느라고 난리인데 이 메일들을 출력해서 보여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궁금하다. 메일박스에서 연애를 막 시작했을 무렵의 사진도 찾았다.


아하하...태어나서 처음 찍어본 이미지 포토. 이때 한번 찍어보곤 이런식의 연출 사진은 절대로 안찍을 거라고 굳게 결심했었는데 웨딩사진으로 인해 결심이 무너져 버렸다.(더군다나 화장까지 했었다) 그리고 분명 머리에 총을 맞았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결혼 10주년마다 웨딩사진처럼 사진을 찍자고 약속을 해버렸다니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다. 내 입으로 뱉은 말이라 어떻게 어거지도 못쓰겠고.....ㅡ_ㅡ;;

요즘 휴대폰은 D-day 라는 참 도움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날짜에 무관심한 나 같은 사람도 D-day 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오늘 휴대폰을 보니, 둘이 서로의 존재를 처음 알게된지 3449일이 지났고, 연애를 시작한지 1949일이 지났으며 결혼한지는 948일이 지났다. 결혼을 하루만 늦게 했으면 전부 마지막 두자리가 49로 끝났을테고, 알게되서 연애 하기까지 1500일, 연애에서 결혼 하기까지 1000일 이라는 계산하기 쉬운 공식이 성립 했을텐데.

사람이 누군가와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이어가다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요즘들어 그동안 싱글로 지내던 친구들도 제각기 짝을 찾아가고 있다. 결혼 준비를 하는 친구도 있고 그 문턱에서 고민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 친구들에게 참 해줄말이 많다. 결혼한지 3년도 아직 채 안된 녀석이 무슨 해줄말이 있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장담하건데 연애를 시작한 후부터 오늘까지, 정확히 1949일동안, 싸움은 커녕 서로에게 짜증낸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젊은 부부의 조언이라면 제법 들을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 아, 물론 싸우지 않은 것에는 아내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컸다. 내 친구들은 다 알겠지만 난 저 나이때 저렇게 행동하지 못했었다. 보다 감정적으로, 자존심을 세웠던 것으로 기억하니까. 사촌 처형 중 한명은 아내가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가끔 능구렁이를 한마리 키우는 것 아닐까 싶을 때도 많다. 분명 나보다 5살이 어린데 50년은 더 나이많은 사람같이 굴 때가 있다. ㅡㅡ; )

어쨌든 오늘은 남들이 의미있게 챙기는 백일단위도, 천일 단위도 아닌 알게된지 3449일, 연애하기 시작한지 1949일, 결혼한지 948일이 되는 날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 집에 들어가서는 나보다 50년은 더 세상을 산게 분명한 아내를 간만에 등에 업고 방을 몇바퀴 돌아줘야 겠다. 무슨데이, 무슨데이 하는 각종 데이들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내 주장대로, 우리에겐 매일 매일이 기념일이자 특별한 날이므로 아무날도 아닌 오늘이야말로 기념할만한 날이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하루를 더 함께 보내지 않았는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