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우리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려면 몇년이 지나야 하는 걸까
유치원 다닐때 누가 커서 뭐가 될거냐고 물어보면 자신있게 "과학자요!" 라고 대답했었다. 공학이 세상을 이끌어 간다고 믿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때는 과학자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존재라고 믿었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같은 질문에 "물리학자" 라고 대답을 했었다. 조금 더 구체화가 되긴 했지만 사실 칼 세이건 의 '코스모스' 를 읽은 영향이 컸다. 당연히 이 당시에 내가 이야기 했던 물리학이라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천체 물리학' 이었다. 그리고 그 천체 물리학의 매력에 어린 나이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었다. 우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구하여 이 세상의 근원을 추적하는 학문! 정말 멋있었다.
그래서 결국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아버지는 공학 우월주의자셨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기초학문 분야 역시 조금은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셨었다.) 물리학과에 입학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입학 후 몇년이 지난 후,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천체 물리학이라는 학문을 하기에 난 그다지 똑똑하지 못하다는 사실과 내 머리로 그 분야를 선택했다간 굶어죽기 딱 좋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몇년의 방황후에 방향을 선회했고 그 다음 분야는 광학이었다. 물론 광학이 천체물리학보다 쉽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교수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는 천재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살벌한 분야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흘러왔다.
아직 확실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슬슬 학위논문에 대한 이야기가 교수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요즘에는 드디어 졸업이 눈에 보이고 있다. 여기저기서 학위 받으면 오라는 곳도 있고 내가 가고 싶어서 찔러보는 곳도 있는 현 상황에서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박사 학위가 잡힐 것도 같다. 만일 이대로 순조롭게 풀려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면 난 꿈을 이룬게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코흘리개 시절의 꿈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학위취득 후의 시간이 손에 잡힐듯 가까와져 오고 그로인해 내 앞날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부터 다른것도 아닌 내 '꿈' 이 옳은 것이었는가 하는 회의가 오고 있다. 회의를 가져온 가장 큰 이유는 한국내 기초학문 연구자에 대한 처우를 바라보며 느낀 현실에 대한 절망이었다. 우리 부부가 전부 외동만 아니었다면 벌써 외국으로 나가는 것으로 내 인생을 틀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형제가 없어 양가 부모님들을 모두 챙겨야 하는 입장에서 내가 좋자고 한국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한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달고 알아본 첨단분야 연구자의 앞날은 답답하기 이를데 없었다. 사회가 인정하는 내 가치가 고작 이정도인가 하는 자괴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직업의 귀천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 사회에 가져오는 부와 행복의 수치만큼의 대접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의 첨단산업을 만들고 이끌어 가고 있는 연구자들이 창출하는 사회적 가치가 결코 작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휴대폰 원천 기술을 개발한 몇명의 연구자가 만들어 낸 가치가 휴대폰 생산 라인에 근무하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가치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포털 사이트에 짧게 적었더니 노동자의 가치를 폄하한다는 댓글이 수없이 달렸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숙련공이 신입보다 많이 받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숙련공이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대가를 많이 받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 숙련공이 일하는 공장이 있을 수 있게 한 연구자가 받아야 하는 대가는 과연 얼마여야 하는 걸까.
사실 공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박사학위까지 받는 사람들은 조금 바보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각자의 집에서, 학교에서 수재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의 집단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들이 바보일리가 없다. 단지 그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바보 소리를 들을 만큼 다른 일에 관심을 끊은 채 한 분야에 집중해야 할 만큼 어려운게 공학이고 자연과학이라고 해석하는게 옳을 것이다. 막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했다는 수학과 물리. 싫어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려워서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던가.
그런 이유로 연구자들은 조금 바보스럽다. 이윤에 밝지도 못하고 인사 문제에도 적극적이지 못하다. 밥그릇 지키는 것에도 둔하다. 농진청 없어진다고 여기저기서 난리를 칠 때, 과기부 없어진다는 소리 들은 과학자들 대부분은 그저 고위직 몇몇이 애를 쓰고 있을 뿐 대부분은 그런가보다 한다. 그러니 IMF 때 제일 먼저 정리해고 당한 것도 연구직이고 회사에서 스마트하지 못하다는 비아냥을 듣는 것도 연구직이다. 그건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본다면 연구자들은 사회에서 약자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하지만 꼭 필요한 약자.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는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또 한명의 지인이 한국을 떠난다는 연락을 해 왔다. 과학자들의 탈 한국 현상이 어제 오늘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선배, 동기들이 한국을 떠났고 떠나고 있다. 하지만 그 지인이 보내온 편지는 날 하루종일 울적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이 우리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려면 몇년이 지나야 하는 걸까. 하지만 너와 다르게 난 이제 기대를 버렸다. 그들이 우리에게 돌아와 달라 애원한다 하여도 난 결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과거 조국을 위해 일해 달라는 요청에 다 벗어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과학자들이 지금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면 이유가 될까...단언하건데 첨단분야 연구자들은 사회의 그 어떤 직종 근무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공무원이나 일반 직종 근무자, 운송업, 생산직 근로자 등등 그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해 봐도 첨단분야 연구자들 만큼 다른 나라로의 이직이 쉬운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순 취업이 아니라 이민이라고 한다면 한국을 떠다기는 훨씬 쉬워진다. 한국 과학계가 지금까지 버텨온 것은 과학자들도 한국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식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유교적인 전통과 교육속에 성장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점차 한국의 현실은 그러한 과학자들이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큰 절을 올리고 비행기에 몸을 싣게 만들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이들을 향해 애타게 손짓을 하는 것은 언제쯤이 될까. 산업을 일으키고 싶어도 과학자들이 없어 이들에게 조국을 위해 돌아와 달라고 사정했던 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절만큼 산업이 퇴보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