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기준
모든 주장에는 도저히 포함시킬 수 없는 극단이 존재한다. 이 극단은 말 그대로 극단적인 경우이며 이러한 부분까지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건 토론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을 입다물게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러한 상대와의 토론은 더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정치인은 능력보다 도덕성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그렇다면 무역이 뭔지도 모르지만 아주 도덕적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앉혀야 하는 거냐는 질문을 제기한다면 그 사람과는 더 이상 토론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질문은 토론에 너무나 자주 등장한다. 상대방의 논리를 궁색하게 하는데 이보다 효과적인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이클 샌델과 같은 이시대 최고의 철학자들 마저도 반대 논리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까지 상대의 논리를 계속 밀고가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우리가 토론을 할 때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상대 주장의 극단에 받아들이기 힘든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상대의 주장이 갖고 있는 보편적 판단 기준이 어느 선에서 그어지고 있느냐이다. 그리고 그 선이 바로 타협의 기준선이 된다.
물론 형이상학적 논리에 실제로 접하게 되는 많은 개별 상황들에 대한 기준선을 일일이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고민은 최소한 우리로 하여금 서로 접근 가능한 타협의 언저리에 머물게 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토론의 목적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결론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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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샌델이 그의 저서 Justice에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자기 결정권에 기반한 안락사 옹호를 비판하면서 합의하에 서로가 먹고 먹혔던 2001년 독일에서 발생한 브란데스&마이베스 사건을 예로 든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