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또는 실패

실패의 경험을 밤새 늘어놓을 수 있을 만큼 내공이 쌓이지 않은 일은 항상 어렵다. 똑같아 보이는 일을 언제는 실패하고 언제는 성공해 봐야만, 그리고 그걸 여러차례 반복해야만 나름의 관점이라는게 생기기 마련인데 실패의 횟수가 부족하면 또는 성공의 횟수가 부족하면 항상 불안하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삼성전자에서 상품기획을 했을 때가 그랬다. 항상 최선을 다해 분석한다고 하지만 살아있는 동물처럼 움직이는 시장 환경을 보며 성공한 제품도 뒤에서는 불안했고 실패한 제품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성공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실패 만큼이나 불쾌하다. 마치 장마철 밀려드는 습기처럼. 

고백하건데, 그리고 전 동료들에게 미안하지만, 삼성전자에서 내가 기획한 제품들은 내 기준에 실패가 성공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왜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당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성공의 원인을 분석한다고는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결과를 상황에 맞게 해석했을 뿐이지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무언가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마치 모든 걸 아는 것 처럼 자신있게 떠들기는 했으나 항상 마음 한켠에서는 거대한 사기극을 벌이는 것 마냥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그 회사에서 일한 전체 기간을 놓고 보면, 상품기획자로 일 한 기간은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상품기획자의 이미지로 조직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3년의 기간 동안 내가 만든 실패와 성공의 이미지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겠지. 재미있는 건, 개발-상기-영업 세 직군을 다 경험했고 그중 가장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건 상품기획이었지만 정작 근무 기간은 셋 중 가장 짧았고, 실적에 의한 공적상은 개발에서 한번, 영업에서 한번 받았을 뿐 상품기획자로써는 의미있는 결과를 내지 못했다. 반면에 개발과 영업에서는 실패의 기억이 없다. 항상 목표를 달성했다.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걸 성공이라고 정의한다면 말이다.

많은 실패를 했던 상기. 성공하기만 했던 개발과 영업. 어쩌면 누군가를 정의하는 건 성공이 아닌 실패의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동료들이 나를 상품기획자로 인지했던 것 처럼.



지금은 회사의 개발 디렉터로 있다. 세곳에 흩어져 있는 개발팀을 묶어서 회사의 로드맵대로 제품들을 만들어 내야 하는 포지션. 항상 마음 한켠을 불안하게 하는 건, 나는 개발 책임자 위치에서 실패해 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첫 미국 회사다. 

이달 초에 회사의 이사회가 있었고, 최근 개발팀이 이룬 성과에 대한 특별 보너스 지급이 결정됐다. 그리고 오늘 아침,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아침에 일어나 그걸 보면서 생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개발 디렉터가 되고 사실상 처음 주어진 핵심 프로젝트였다. 석달에 한번씩 열리는 이사회의 고정 안건으로 진행 결과물이 보고될 만큼 모두가 관심을 두고 있는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가 시작할 때 뒤에서 모두가, 심지어 해당 제품의 product manager마저도 내게 그랬다. 말도 안되는 프로젝트고 어차피 실패할게 뻔하니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Chairman과 CEO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면서 나를 동정했다. 그런데, 그걸 성공시켰다. 그것도 애초 주어진 목표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그게 잘 팔리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이제는 모두가 그런다. 이걸 못팔면 그 땐 영업이 책임져야 한다고.

그런데 정작 나는, 도대체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해서 성공한건지 모르겠다. 열심히.. 정말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내 노력으로 모든게 된 건 분명 아니고 중간중간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항상 부정적인 목소리를 냈던 시니어 엔지니어 한명도 프로젝트 중간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던 이슈를 하나 해결해 냈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 아니라 5천 피스로 흩어진 퍼즐이 되어버린다는 것. 하나로 관통하는 뭔가가 분명 있을텐데 그걸 모르겠다. 

다름 아니라, 실패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공의 한켠에 대고 그걸 비교할 기준점이 없기 때문에 성공한 혹은 실패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이 프로젝트도 돌이켜 보면 나는 일선 개발 책임자처럼 뛰어다녔지 회사의 개발팀장처럼 일하지 않았다. 숲을 보지 않고 나무꾼처럼 도끼를 들고 뛰어 다녔다. 개발 디렉터로써, 내가 이룬 성공은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이번 프로젝트는 개인적으로 실패일지도 모르겠다. 개발 디렉터로 역할을 한 게 없으니까. 내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이벤트일 뿐이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이런 프로젝트가 또 주어진다면, 나는 다시 맨땅에 헤딩해 가며 불안에 떨어야 한다. 왜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는지 모르니까. 이제는 많은 이들이 '기대' 라는 걸 할테니 어쩌면 상황은 더 나쁠지도 모른다. 


답답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