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본 위스키 그리고 비 내리는 여름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밤 10시 즈음 오늘의 마지막 미팅이 끝났다. 미팅 참석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시간쯤 되면 어지간히 중요한 미팅이 아니고는 집중이 되지 않는다. 가만 보면, 컨퍼런스 콜에서 나한테 필요한 이야기만 골라 듣는 솜씨만 자꾸 늘어 가는 듯. 그리고 그마저도 이 시간이 되면, 잘 들리지 않는다. 체력의 한계랄까. 어쨌든... 오늘의 모든 미팅은 조금 전 끝났다. 만세.
미팅을 마치고 난 뒤 메일을 정리해서 보낼 것들 마지막으로 보내고 베이스먼트에서 올라오다 세탁실에 들려 세탁기를 돌리고 부엌으로 와서 저녁 식사 뒤 쌓인 설겆이 거리를 정리해서 식기 세척기에 넣었다. 아내는 먼저 잠들었는지 조용하다. 요즘 피곤하다며 일찍 잠들곤 하는데 괜시리 깨울까 걱정돼 혹시라도 잠들었나 살피러 올라가보기 애매하다. 어차피 세탁기가 다 돌고 나면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돌려놓는 것 까지는 해야 해서 그 때까지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 크롬북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쌍의 자석처럼, 위스키 잔도 함께.
버본 위스키를 한잔, 과하지 않게 따라서 불 꺼진 다이닝룸에 앉았다. 버본은 내 취향은 아니다. 미국에 살고 있으니 캔터키 버본을 마셔주는게 도리에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예전에 했었는데 버본 특유의 달콤하고 스파이시한 맛은 좋아하기 어렵다. 하지만 버본 위스키의 진한 색은 참 매력있다. 특히 이렇게 적당히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라면 바라보는 것 만으로 분위기에 취할만큼. 어쩌면 그래서 매번 괜히 샀다고 후회하면서도 버본 위스키를 한병씩 집어 오는지도. 위스키만큼 분위기로 마시는 술도 없으니까. 하지만 한모금 머금은 지금은 여전히 후회가 된다. 괜히 샀다고. 다음엔 꼭 싱글몰트 스카치 위스키를 들고 와야지 하는 별 의미 없는 다짐을 한다.
오늘 밤부터 시작해서 일요일까지 줄기차게 내린다고 예보되어 있는 비는 조금 전 그 시작을 알렸다. 다이닝룸의 창문을 열었더니 훅 들어오는 습하고 더운 공기와 함께 불규칙적인 비소리가 창문턱을 넘어온다. 분명 습하고 더운 공기가 밀려드는데 나쁘지 않다. 어쨌든, 여름이니까. 더구나 이렇게 비오는 걸 듣고 있는 순간이라면 무슨 상관이랴. 모습으로 내리는 눈과 달리 비는 소리로 내린다. 다른 곳을 바라봐도, 심지어 눈을 감아도 비는 창틀을 넘어 내게 내린다. 진한 위스키와 덥고 습한 공기. 그리고 잔잔하게 내리는 비소리. 여름밤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오늘은 좀 늦게까지 이렇게 음악을 들으며, 버본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