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습작



[강릉, 경포해변]
군 시절 이야기.

당시 내가 있던 내부반 규칙이 상병이 되면 근무시간 외에는 원하는 걸 하면서 자유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미대 출신이던 바로 한달 고참 한명이 상병 휴가를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이런저런 미술 도구를 들고 들어왔다. 몇 날 며칠을 연필과 스케치북을 갖고 고민하는 듯 하던 그 고참이 어느 순간부터 목탄을 칼로 긁어서 가루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며칠만에 몇 자루의 목탄을 그렇게 깎아서 가루를 제법 많이 모았다.

그는 그렇게 모은 목탄 가루를 손가락에 찍어서 스케치북에 그려놓은 밑그림에 문질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뭐랄까, 마치 수채화 물감을 붓으로 칠하듯 손가락으로 목탄 가루를 문질렀다. 그 시점부터 그 고참이 작업할때면 난 옆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게 한동안 일상이었다.

그림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었다. 어렸을 때 연필로 쓴 글씨나 그림을 손으로 문질러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느낌의 그림이 나왔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검은색 입자가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퍼진 느낌과 그림에서 보여지는 아기와 어머니의 모습이 어울어져서 무척이나 인상깊은 작품으로 변해갔다.

그 그림은 그때까지 미술 작품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내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림과 사진 등 회화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해줬다. 그에게 그 그림을 달라고 한동안 졸랐으나 습작이라면서 결국 폐기해버렸다.

어쨌든 그 이후 내게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해야하나)처럼 남은 그 목탄화의 이미지는 내가 사진을 시작한 이후 흑백 필름 사진에 매달리게 하는 이유가 됐다. 그냥 흑백인 것도 모자라 보통은 피하고자 하는 필름 입자가 도드라지게 드러난 그런 사진에 몰두했다. 그래서 내가 사진을 찍을때 추구하는 이미지는 대단히 선명하다. "입자감 가득한 흑백의 목탄화 같은 사진" 에 모든 관심과 스터디가 집중되어있다.

오늘 노트북으로 만지던 사진을 USB에 담아 거실의 큰 TV화면으로 띄워서 결과물을 보면서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목탄화 비슷해지긴 했다'는 생각과 함께 문득 과거의 그 일이 떠올랐다다. 제대 후 연락이 끊긴 그 고참은 그 길을 계속 갔을까? 천재적인 작가는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마음을 울리는 그림을 그릴 줄 알던 사람임에는 분명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