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배설
갑작스런 생각의 배설.
JD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을 처음 접한건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 Stand Alone Complex' 를 통해서다. 정확히는 SAC중 웃는남자,Laughing man, 편이었다. 그런데 Laughing man 역시 JD샐린저의 또 다른 단편소설 제목이라는 점에서 얼마나 이 시리즈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웃는남자' 편 보다는 '개별11인' 편이 더 인상깊었지만 작품의 완성도에서는 웃는남자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이 유명한 고전을 읽어보지도 않고 살다가 다른 작품에서 인용된 문장을 보고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약간은 한쪽 마음이 캥기는 느낌도 있었지만 뭐 어떤가. Stand alone complex 역시 그 자체로도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인걸. 더구나 당시에는 그저 그런 느낌이었던 '초연결 사회' 가 실제로 도래한 지금, 이 작품의 내용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어쨌든 이 애니메이션에서 인용된 '호밀밭의 파수꾼'의 구절은 " "나는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인간이 되려고 했다" 였다. 너무 축약해서 번역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오히려 대단히 간결하게, 잘 번역한 것 같다. 직역하면 "그곳에서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살 참이었다. 그러면 누구하고도 쓸데없고, 바보 같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가 되는데, 문학 작품의 인용구를 들먹이며 빠르게 대화가 오고가던 '웃는남자' 편의 마지막 도서관 씬에서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은 속도감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어쨌든, 난 마음에 든다. (번역 이상하기로 따지면 사실 '호밀밭의 파수꾼' 이라는 한글 제목이 더 이상하다. 원 제목은 "The Catcher in the Rye" 니까. 실제로는 '파수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절벽 아래에 서서 호밀밭에서 놀다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지는 아이들을 '받아주는' 역할을 하겠다는 대사에서 나온 'catcher' 라는 원제목의 단어와 많이 느낌이 다르다.)
이 책 이야기를 하는건 오늘 새벽에 잠이 깼을 때 시간을 확인하려고 스마트폰을 찾아서 화면을 켜고 습관처럼 페이스북을 열어보는 순간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 "아무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할테니까", 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공간이 페이스북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홈페이지부터 시작해서 블로그를 거쳐 페이스북으로 오는.. 간접 교류의 수단들에 몰두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아마 얼굴을 직접 보고, 손을 맞잡고 하는 직접적인 관계는(특히 회식과 같은 다수와의 만남) 부담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고립을 원하지는 않는 내 이중성이 그런 행동의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좀 더 심해졌다. 심해질 수 밖에 없다. 여기선 친지나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으니까,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셈이다. 그런 이유로 미국에 와서 한동안 메신저로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대화를 많이 했었는데 요즘은 그것마저 거의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렇게 대화를 하고나면 그가 더 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마지막 문장 그대로,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때문.
말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리워지고, 사람들이 그리워지면 말을 많이 하게 된다. 그 순환 고리에서 도돌이표처럼 맴돌다 보면 말로 실수를 하기 쉽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내 의도와 관계없이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많이 했는데 하나같이 내 원래 의도와 동떨어진 상황들이었다. 하지만, 느낌은 주는 자의 영역이 아닌 받는자의 영역이므로 내 의도는 중요한게 아니다. 내 말에 남이 상처를 받았다면 그건 내 잘못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점차 말수를 줄이고 있었는데 얼마전 메신저로 여러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하다 한쪽의 말을 다른쪽에 잘못 전하면서 크게 실수를 범했다. 사소한 일상에 대한 대화가 시작이었는데, 그렇게 대화를 하자 이사람 저사람이 그리워졌고 그들에게 각각 대화를 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벌어진 사단이었다.
수습할 수도 없었다. 나는 태평양 너머에 있으니까. 얼굴 보고 사과하는 일 따위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오간 몇마디 말에 나 역시 긁혔다.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긁힌 자국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상대의 것도, 내 것도.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 메신저로 오가는 짧은 호흡의 대화가 얼마나 수습하기 어려운 곤란함을 만들어 내는지를 다시 깨달았기에, 긴 호흡의 대화를 할 게 아니라면 차라리 입을 닫아버리는 걸 선택했다. 내 자신이 상처 받는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기에,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너무나 싫다. 그게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할 것 없이.
그래서 어찌보면 방언에 가까운 글이 내게는 긴 호흡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탈출구일 수 밖에 없다. 민감한 이야기들은 모두 일기장에만 적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그런 그리움에 방백처럼 떠드는 이곳에 기대어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새벽. 어둠속에서 환하게 불이 들어온 스마트폰의 스크린을 바라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고 그렇게 아침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사회를 살고 있기에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막으면 매일같이 사람들과 대화하고(채팅, 전화 다 포함) 같은 취미를 즐기면서 전혀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딱 한가지. 가끔이라도 얼굴을 마주하거나 서로 서운한게 생겼을 때 찾아가서 풀어줄 수 없다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게 주는 단점은 무척 크다. 오히려 자주 연락 가능하지만 서운한게 있을 때 풀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연락 자체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예전에 비해 원만하게 관계를 유지하기 더 어려워 졌다고도 할 수 있어 보인다. 그만큼 의도치 않게 서운하게 할 가능성도 높아지니까.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그리고 이곳에서 새로 사귄 사람들과의 관계는 또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