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이는 날


[서울 타워 @2008 / Pentax KX / Film scan]

유난히 멀리 보이는 날이 있다. 

공기가 깨끗하고 시야가 좋아서 멀리까지 잘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발밑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기 바쁜 일상중에 어느 순간 문득 멈춰서서 시선이 멀리.. 하늘이나 지평선 너머를 쳐다보듯 멀리 있는 곳을 향하게 되는 그런 날이, 살다보면 종종 있다. 

그렇게 시선을 멀리 두게 되면 필연적으로 걸음이 느려지거나 대부분은 멈춰 서게 된다. 예외는 없었다. 바로 발 밑을 보면 종종걸음을 걷게 되고, 멀리 보면 느려지거나 서있게 된다. 이게 인과관계인지, 상관관계인지 아니면 반대로 걸음을 멈췄기에 멀리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건지 선후 관계는 모르겠지만. 

[Livingston @2020 / Samsung Galaxy S10]

그것이 하늘에 펼쳐진 노을이든, 아니면 눈을 감아야 펼쳐지는 마음의 지평선이든 상관없이, 그렇게 멀리까지 보이는 날이면, 마음의 잔물결들이 사그러들고 좀 더 깊게 가라앉아 있던 여러가지 것들이 떠오르고는 한다.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지나갈 것들에 대한 생각들. 지나간 시간, 풍경. 그리고 사람들. 내 삶에서 어느덧 지나간... 멀리 가버린 그런 사람들.


시선을 멀리 두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을 때 떠오르는 감정이 평온함인지, 쓸쓸함인지 아니면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그리움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마흔 세번이나 의자를 옮겨가며 해지는 모습을 바라봤던 어린왕자는 분명 쓸쓸함이었겠지만, 뒷마당에 앉아 시선을 멀리 두고...그렇게 있는 내 마음에 드는 것들이 쓸쓸함인지 그리움인지 구분짓기는 정말 어렵다. 혹자는 '그게 그거'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세심하게 어휘를 선택해서 생각하고 글을 쓰려다 보면 이 둘은 분명 다르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Starbucks in Rancho Palos Verdes, CA @2017 / Blackberry Key1] 

지난 몇 달, 유난히 멀리까지 시선이 가 닿은 날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만큼 사람들이 떠올랐고, 풍경이 떠올랐고, 그 시간속의 내가 떠올랐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횟수는 많았으되 이어지지 않는 날들이었고 매번 단절되는 그런 시간을 통해 내 마음 깊숙한 곳의 이야기를 어루만질 수 있는 기회를 잡기는 어렵다는 것. 그래서 항상 그렇게 떠오른 시간들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내 감정을 정의하지 못하고 시선을 거둘 수 밖에 없다.


생택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쓸 때, 그도 비좁은 비행기 안에서 전쟁터의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비슷한 느낌이었을까? 그가 묘사한대로 -어린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내 마음의 흐름을 어루만질 수 있을때 까지, 마흔세번이 아니라 아흔아홉번이라도 의자를 옮겨 가며 해지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싶다. 


그렇게 시선을 멀리 두고, 충분한 시간동안 지나간/지나갈 것들에 대한 작별을 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