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기 그리고 묘사하기

[Still life @2008 / Pentax KX / Film scan]


삶을 단정하기는 쉬우나, 묘사하는 것은 어렵다. 


이민을 오고난 후,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지만 내 삶을 단정하려는 지인들이 참 많다. 좋게 생각해 보자면 단정지어서 말하기 쉽기 때문이리라. 한국에서 어떠했다든가, 미국에 갔으니 어떨 것이라든가. 나는 그들에게 내 삶을 자세히 묘사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건만 모두들 내게 듣지 않은 이야기로 내 삶을 단정한다. 그렇게 단정한 내 삶을 놓고 평가하는 것은 덤이랄까. 

하지만 이민자의 삶은 그 유별남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렵다. 이렇게 글로 묘사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단어를 늘어놓고 보면 그저 부족한 어휘력의 한계를 깨닫게 될 뿐이다. 이 삶은, 회상은 할 수 있을 지언정 묘사할 수는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진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과도 다르다. 그 경우는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일부지만 직접 만져보고 설명하는 상황이지만 이민자의 삶은 그렇게 만져보기는 커녕,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다더라 하는 설명만 그것도 부분에 대해서만 간단히 듣는 격이다. 그러다 보니 랜딩하고 나면 어떻게 주위를 둘러볼 시간도 없이 알지도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바쁘다. 분명 어떻다고 들었는데, 내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은 건가 싶을 정도로, 낯설고 마음 바쁘다. 랜딩의 충격은, 누구에게나 거칠다.  


어떻게 보면, 내가 묘사할 수 없으니 저들에게 마음대로 넘겨짚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알려줄 방법이 없으니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도 즐거움을 나누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묘사하기 어려우니 단정짓는이를 나무랄 수도 없고 단정짓는 이들의 이야기에 동조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서로를 어색하게 만든다. 공감하지 못해 어색하고 공감받지 못해 어색하다. 시간 속에 순간을 강제한, 위에 올린 정물 사진처럼 그렇다. 분명 맥주 한잔 하다 찍은 사진이건만 저 맥주캔을 만졌을 때 느꼈던 손 끝의 차가움이 어땠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묘사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묘사할 수 없는게 비단 삶 뿐만은 아닌가 보다.


첫해에 그토록 자주 연락을 주고받던 이들과 점차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모두 그 것 때문이라고, 누군가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냥 이 삶이 그런 삶이라고 단정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