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말 vs 도움되는 말
말이 참 어렵다.
분명 같은 말인데, 한꺼풀만 벗겨내면 천의 얼굴이 있다.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도 있고, 남에 대한 친절을 가장해서 상대를 괴롭히기 위한 말도 있다. 논리의 방향이 아닌, 표현속에 있는 허점을 찾아내어 상대를 괴롭히는 토론 방식도 있다. 하지만 가장 날 괴롭히는 건, 맞는 말과 도움되는 말이 가져오는 차이다.
맞는 말을 하는 건 쉽다. 정말 쉽다. 특히나 논리적으로 따지는 걸 좋아하고 잘 하는 사람들에게 상대방을 향해 맞는 말을 쏟아내는 건 숨쉬는 것 만큼이나 쉽고,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일이다. 하지만 도움되는 말을 하는 건 정말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도움되지 않는 말이 '맞는 말' 이라는 탈을 쓰고 도움되는 말인 척 상대에게 건너간다. 그리고 상대에게 상처를 남긴다.
내가 '맞는 말' 이라는 탈을 쓰고 무례한, 심지어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건 이십대 중반 무렵.(심지어 일정 부분 즐기기도.)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을 했고 이후 점차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리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말을 아낀 이유는 딱 한가지. 어떻게 해도 그 버릇을 고칠 수 없었던 것. 꾹꾹 눌러 놓고 잘 참고 지낸다 싶다가도 어느 순간 터져나오면 도저히 수습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아내에게 한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서로 존대말을 하자고. 뭐라도 하나 방지턱을 놓아야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조심할 것 같았다. 결과? 잘 모르겠다. 결혼한지 2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도 서로 말을 높이고 있지만 나는 종종 아내에게 맞는 말 이긴 하지만 별 도움되지 않는, 가끔은 상처도 됐을 것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내는 다르다. 아무리 그게 이견이 없는 맞는 말이라도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말을 아낀다. 그러다 보니 내 주위에 있는 이들은 종종 내게 상처를 받지만 아내 주위에 있는 이들은 상처를 받지 않는다. 이견이 생기고 갈등이 있기는 하나 그게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한 상처는 아니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20년이 넘게 노력해도 잘 안되는 걸 숨쉬듯 자연스럽게 하는 아내를 보며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오는지 궁금할때가 많다.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건지, 어렸을 때 부모에게 받은 교육의 차이에서 오는 건지.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은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상처를 주는 쪽이셨던 것 같기도. 어디에서 기인했든 상관없이 아내의 그런 모습이... 참 부럽다. 내 아이들은 내가 아닌 아내의 성향을 물려 받았으면 싶고.
어쨌든 자꾸 말이 줄어든다. 맞는 말을 하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느니 그냥 과묵한 쪽을 선택하는게 나으니까.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책을 통해 맞는 말만 하며 살아야 한다면 평생 몇마디나 할 수 있겠는가 라며 맞고 틀리고를 걱정하지 말고 상대에게 선의를 베풀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중학생 때 읽고 정말 인상 깊었던 구절. 그러고 보니 혹시 이 책 때문..?) 세상에는 맞는 말을 한다며 도움되지 않는, 심지어 선의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말을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인터넷이 보편화 된지 20년... 그런 성향은 점점 더 짙어지는 듯 하다.
추기경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제 침묵이 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시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