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개

잔뜩 흐린 하늘을 화면 가득 띄워놓은 아침 방송에선 하루종일 서울 지역에 는개가 내릴거라 이야기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같이 얼굴이 찌푸려 졌다. 모든이가 잠든 밤에 살며시 오는 는개라면 몰라도 한참 돌아다님이 많은 낮동안 내리는 는개라니. 우산을 써도 소용 없지 않은가. 더구나 모름지기, 비는 소리로 내리고 눈은 모습으로 내려야 하는 법이다. 비가 모습으로 내리려면 최소한 그 소리를 대신할 음악이라도 챙겨야 할텐데 배터리가 방전된 내 MP3 플레이어는 가져가 봐야 짐만 될 뿐이었다. 음악도 없는 상황에서 소리없이 내리는 비는, 천둥 번개를 동반하고 함박눈이 내리는 것 만큼 어색한 일이다.

웃을 일인지, 화낼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상청의 예보는 빗나가 오후 2시를 지나면서 제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비가 오려면 최소한 이렇게는 와야지. 가물어도 너무 가물어 울창한 삼림에 사람의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불이 붙는 지경인데 안개처럼 흩뿌리다 마는 비는 보는이의 갈증만 더 심하게 만들게 뻔했다.

비오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카메라를 가져올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전 주말에 이사 후 처음으로 필름을 현상했다. 근 넉달만인듯 하다.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빠서 필름 한롤 소모를 못하고 카메라에 물려놓고 살았는지. 수세를 마친 필름에 상이 제대로 맺혔는지 확인하면서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안온함을 느끼곤 나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무엇이 그리 좋았을까. 양팔을 한껏 벌린듯 넓은 흑백 필름의 관용도가 아니었으면 제대로 건진 사진이 몇장 없었을 상황이었는데.(노출계 없이 짐작만으로 찍었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준다 하더라도) 뭐, 아무렴 어떤가. 좋으면 된거지. :-)

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건물 밖으로 나가질 못해 건물 전체가 웅웅거리는 소란스러움에 잠겨 있다. 그리고, 다른 소음과 달리 이런 웅성거림은 사람을 노곤하게 만든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여유로와 진다. 아마 그래서일까? 비오는 날 유난히 쌉싸래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동동주 한사발이 생각나는 것은.

배낭에 옷 우겨넣어 여행을 떠나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필름을 현상하고, 협탁에 마주앉아 동동주 한사발 함께 들이킬 친구가 항상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 살이가 그리 원하는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

그래, 여유롭게 생각하자. 귀찮기 그지없는 는개비도 봄비라는 이름을 붙여보면 그리 못마땅 하지 않은 것처럼 일말의 여유도 없이 쫓기듯 사는 일상이라도 지금의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 신발끈 동여매고 잠시 여행을 다녀올 시간이 주어지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여행은, 내가 누렸던 그 어떤 여행의 달콤함 보다도 더 달콤하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