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기억속에 남아 있는 시간에는 순서가 없다.  

지난 주말.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고, 문 앞에는 리스를 달았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작년부터 수십년 전 내가 막내와 같은 나이였던 시절까지 랜덤 박스에서 물건을 꺼내듯 순서 없이, 무작위로 올라온다. 마치 꼭 그래야 하는 것 처럼. 

그 중에서도 파편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기억이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이벤트는 두개인데 하나는 유치원때고 다른 하나는 4학년 때. 

유치원때의 기억은, 낮에 어머니와 함께 설치한, 알록달록한 크리스마스 전등으로 퇴근한 아버지를 놀래켜 주기 위해 온 집안의 불을 다 끄고 있다가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 전등만 키며 나름 서프라이즈! 를 했던 일.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마당의 대문을 열고 닫는 소리를 듣고는 신이 나서 내가 외친 "아빠 왔어요!" 가 워낙 우렁찼기 때문에 미리 눈치채고 계셨다고 봐야 겠지만 어린 내가 충분히 만족할 만큼 깜짝 놀라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휘황 찬란한 조명도 아니고 그저 알록 달록한 색을 가진 전구 몇개에 불과했지만 그때의 내게는 온 세상을 밝히는 거대한 아름다움이었다. 불을 꺼 놓고 손에 트리장식 전구 스위치를 쥐고는 소파 뒤에 숨어서 현관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그 순간까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단지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만이 아닌 그 시절을 상징하는 기억중 하나. 

두번째 기억은 좀 씁쓸한데, 내가 싼타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공표한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4학년이었고 사실 이미 한참 전부터 싼타의 정체를 알고는 있었으나 언제 알려야 할지 타이밍을 보던 중이었다. 싼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가셨다며 들고온 선물을 내가 누가 준건지 알고 있다면서 선물에도 관심 없다고 말했을 때의 그 순간, 부모님의 어쩔줄 몰라 하는 표정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이를 키워보니, 이쯤 키웠으면 아이가 싼타를 믿는지 아닌지 눈치챌 법도 한데 전혀 그런 의심을 하지 않고 있던 부모님이 참 순수하셨다는 생각도. 한두해 정도는 좀 더 모른척 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이미 늦었다. 술 취한 아버지가 밤 늦게 사들고 온 통닭을 배부르다며 먹기를 기부했던 일 처럼,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런 날이 아버지에게 유달리 삶이 힘들었던 날이라는 걸.. 지금이 아닌 그 때 알았더라면 맛있게 먹는 시늉이라도 해드렸을텐데.


이렇게 기억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덧 몇 시간 시계 바늘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기억속에, 상념속에 묻혀 허우적 거리던 시절은 분명 지났건만 아직도 지척에서 넘실대는 그 흔적들은 손쉽게 걷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닌 듯 하다. 신발이 젖지 않게 그저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으며 사는 수 밖에. 

아니면 가끔.. 와인을 한 병 따 놓고 그냥 푹 젖은 신발을 신은채 그 기억속을 돌아다녀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번 주말은 와인 없이 지나가려 했는데 또 이렇게 하나의 핑계거리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