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아침 레몬티
1.
아침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아 아내는 일을 하고 나는 책을 보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한번에 하나에만 집중해야 일이 진도가 나가는 나는 일 할 때 만큼은 대화가 불가능한데 멀티 태스킹에 능한 아내는 정신없이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타이핑 하고, 마우스를 클릭 하면서도 내가 건네는 대화를 위화감 없이 잘 받아준다. 흉내내고 싶어도 흉내낼 수 없는 재주.
그렇게 서로 마주 앉아서 나는 어제 밤 내가 본 영화, Sorry we missed you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는 미안해요 리키 라고 번역된 영화인데 번역된 제목이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택배 기사인 리키의 이야기고, "부재중이라 물건 전달을 하지 못했습니다" 라는 뜻인 원제목을 고려하면 - 그리고 영화 전반에 걸쳐 강력한 클리셰로 등장하는 그 문장의 의미를 고려하면 - 잘못된 번역에 가깝다.
어쨌든 스크린 너머의 하지만 현실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삶과, 죽도록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기 어려운 삶을 사는 이들이 많은 세상에 대한 (하소연에 가까운) 내 이야기를 아내는 잘 들어준다. 반면에 나는 이야기든, 책이든 동시에 못한다. 영화 이야기를 할 때는 책을 덮어 놓아야 하고, 책을 읽을 땐 조금 전까지 열을 올리며 영화 이야기 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말이 없어진다. 정신 없는 쪽이 누구인지 이쯤되면 헷갈릴 수 밖에 없다. 그것 역시 나만 헷갈리는 거겠지만.
2.
내가 펴든 책은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 지난 주말에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빙 세일 한다는 가정에서 한국어 책을 판다는 글을 보고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연락해서 내가 사겠다고 했다. 사실 아이들을 위해 리디북스를 구독하고 있기 때문에 한글 책들을 읽으려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음에도 나 자신은 영어에 조금이라도 더 익숙해져야 한다는 강박감에 지난 2년동안 아마존 Kindle 만 들고 영어로 된 책만 읽었다. 그러다 이날, 책 제목을 보여준다며 찍어 올린 사진에서 "독일인의 사랑" 을 보는 순간 그런 망설임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판매자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있었다.
독일인의 사랑은 여동생이 중학생이 될 때 내가 책 첫페이지에 편지처럼 축하 메세지와 함께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를 적어서 건네준, 기억속에 남아 있는 책이다. 그냥, 제목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의 수많은 기억들과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던 우리의 십대와 이십대가 생각이 나서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과 둘이 술도 참 많이 마셨다. 남자 친구와 싸웠다고 속상해서 불러내고, 아빠와 싸웠다고 불러내고, 미래가 불안하다고 불러내고, 날씨가 좋다고 불러내고, 비가 온다고 불러내고, 기분 좋은 일이 있다며 불러내고, 그냥 보자며 불러내는... 휴대폰 최신 통화 목록에 항상 있어서 따로 번호를 누를 필요조차 없었던 그런 동생. 세상의 모든 일들이 서로 전화해서 불러낼 수 있는 핑계 거리였고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말할 수 없는 집안 관련된 고민까지.. 모든걸 공유하는 친구였던 동생이다. 내 이십대를 돌이켜 볼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독일인의 사랑은 그렇게 한명, 바로 동생이 생각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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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팅 용어들로 점철된 띠지와 겉싸개가 없는 원래의 책 디자인이 좋다 |
그런데 책들은 그 이유로 사놓고(다해서 90달러 넘게 지불했다) 막상 읽을 때는 표지가 강렬하고 예쁘다는 이유로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에 제일 먼저 손이 갔다. 하기야 원래 책은 읽으려고 사는게 아니라 사놓고 읽는 거라니까, 상관이야 없겠지만 동생이 이야기를 들으면 웃으리라. 나도 책을 펼치면서 피식 거렸으니까. 그래도 나는 디자인이 예쁜 책이 좋다. 생각난 김에 오늘 저녁에 연락해 봐야지.
3.
그렇게 두시간이 넘게 아내와 잡담을 하고 잠깐 안방에 가서 누울까 싶었는데, 가스렌지 위의 주전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차갑게 식은 커피가 반쯤 남아 있는 아내의 커피잔을 흘깃 보고는 안방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한마디 건넸다.
"따뜻한 차 마실래요?"
1초의 망설임도 없다. "좋지요."
"어떤걸로..? 레몬차?"
"네~"
왜 레몬차를 권했는지는 모른다. 그냥 뭔가 차분하고, 고요하고(세 사내 아이들은 자기들 방에서 레고와 함께 침몰했다) 약간은 흐린 겨울 아침이어서 어울릴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는지도. 주전자 불에 올리고, 레몬청을 담아놓은 병을 찬장에서 꺼냈다. 어떻게 하든 맛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깔끔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주전자에 넣고 끓인 후 찻잔에 따로 담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잠시 후 물이 끓어 레몬이 진하게 우러난 물을 커피 프렌치 프레스에 넣어 레몬 건더기들을 걸러낸 깔끔한 레몬티를 유리 찻잔에 넣어 아내에게 가져다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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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냥 커피 머그잔에. 이왕 사진을 찍을거면 유리잔을 찍을걸. |
잠시 멈췄던 대화는 이렇게 따뜻한 레몬차를 두고 다시 의미 없는 잡담으로 이어졌다. 레몬차의 향을 맡은 아이들이 내려와 자기들도 마시겠다고 해서 잠시 식탁이 시끌벅적. 아이들이 마시기에는 약간 레몬맛이 강해서 모두들 내가 따라준 것만 마시고는 다시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아마 엄마 아빠 하는 건 다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었겠지. 이 와중에도 시크한 첫째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재미없는 녀석.
4.
레몬차를 다 마시고 나자 레고에 실증난 아이들이 거실로 내려왔다. 다 놀았으면 한글학교 숙제를 하라는 엄마의 이야기에 아이들이 난색을 표한다. 한글학교 숙제가 일기인데 "한게 없어서" 일기를 쓸 수가 없다는 것. 하... 사내녀석들. 그런데 아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유리용 마커를 꺼내줬다. "그리고 싶은거 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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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창에 그려진 트리와 메리크리스마스 |
한국 집에서는 베란다쪽 커다란 유리창을 거대한 캔버스로 사용 했었는데 미국 집은 유리창들이 작아서 작가들이 금방 흥미를 잃었다. 낙서의 예술혼은 아무리 봐도 캔버스의 크기에 비례하나보다. 어쨌든 일기에 적을 일이 생긴 아이들은 기쁘게 서재로 돌아가서 딱 두줄짜리 일기를 써 왔다. 유리창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파란색이 필요했는데 없어서 실망이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피식. 고학년 되서 에세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 고생 좀 해봐라.


